삼례 책공방과 완주의 선택

삽화=권휘원 화백

완주군 삼례읍, 옛 농협창고를 개조해 복합문화공간이 된 삼례예술문화촌에 ‘책공방북아트센터’가 문을 연 것은 지난 2013년이었다. 올해로 7년째. 삼례예술촌을 구성하고 있는 공간 중에서도 ‘책공방’이란 이름으로 익숙해진 이 공간은 오래전 쓰임을 다하고 버려지거나 버려질 뻔했던 인쇄기계와 온갖 도구들이 모인, 그야말로 살아 있는 인쇄 박물관이다.

사실 책공방 운영자이자 이 귀한 물건(?)들의 주인인 김진섭대표는 이곳 삼례와 특별한 인연이 없다. 김 대표의 말을 빌리자면 ‘우연한 인연’으로 이곳에 20년 가깝게 이어온 책공방의 모든 자산을 풀어놓았다. 낯선 외지에 정착하는 일에 두려움이 없지 않았지만 김 대표는 이곳으로 오면서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책공방의 일상을 기록하고 책기획자를 양성하는 일이었다. 어느 것 하나도 쉽지는 않았으나 그는 문을 연 이후 5년 동안 서두르지 않고 책공방 사업의 기반을 닦아나갔다. 기록의 힘과 가치를 공유하고 확산하는 일을 본격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조선시대 출판의 중심지였던 전주가 근거리에 있다는 것도 그의 의욕을 부추겼다.

그가 ‘우리 공방에서 무엇을 기록할 것인가’ 고민하며 맨 처음 얻은 답은 ‘완주 기록’이었다. 완주 주민들을 대상으로 자서전 학교를 운영하며 지역에서 태어나고 자란 어른들의 삶을 기록하는 프로젝트나 책기획자 양성 프로젝트로 지역 주민 26명의 자서전이 만들어지고 전국에서 찾아온 젊은 활동가들이 책기획자가 되었다.

큰 무리 없이 계획한 사업들이 진행되면서 그의 꿈은 더 커졌다. 누구나 책을 만들 수 있게 하는 일, 책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일구는 ‘책 학교 설립’은 그의 목표가 되었다. 그는 이 꿈을 삼례에서 이루고 싶었다. 2년 전 삼례예술촌을 새롭게 수탁한 단체와 직원 고용을 두고 깊은 갈등을 겪으면서도 꿈과 희망을 버리지 않던 김 대표는 책마을 삼례의 미래를 상상하게 해주었다.

지난 10월 어느 날, 김 대표로부터 뜻밖의 문자를 받았다. ‘삼례예술촌 재수탁 연장 불가 결정으로 2020년 12월말까지 근무하고 이전해야 할 것 같다’는 소식과 함께 건네는 인사 문자였다. 삼례예술촌의 천정 높은 공간을 가득 채웠던 오래된 인쇄기와 귀하디 귀한 인쇄 도구들이 떠올랐다.

뜻하지 않게 안게 된 소중한 문화자산이 아무런 명분 없이 지역을 떠날 상황이다. ‘문화도시’를 향하고 있는 ‘완주’의 선택이 안타깝다. /김은정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