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연택 전 장관에 듣는 '전북의 길'

"초광역권 통합논의 속 다른 지역 들러리는 안돼"

전국 광역자치단체가 수도권에 대응한 초광역경제권 통합 논의가 한창이다. 부울경(부산·울산·경남)과 대구·경북, 광주·전남에서 행정 및 경제권 통합이 본격화되고 있다.

그러나 전북은 조용하다. 전북만의 특화전략을 모색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지만, 아직 뾰족한 대책은 없다.

이에 전북 출신 원로를 만나 전북의 길을 물었다. 이연택(84·고창) 전 총무처 장관.

그는 청와대 수석비서관 및 총무처·노동부 장관 등을 역임하면서 전북 현안을 직접 챙겼다. 새만금 사업과 용담댐 건설, 2002 월드컵 전주경기 유치, 무주 태권도원 유치 등 굵직한 현안해결 및 위기 현장에는 항상 그가 자리했다.

그의 경험과 지혜가 변화와 혁신의 길목에 선 전북에 소중한 지침이 될 것으로 보인다.

 

-고향을 떠난 지 60여 년이 지났는데도, 고향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1955년 대학에 입학해 서울에 올라와 하숙집을 구하려는데, 전라도라고 기피해요. ‘방 있어요’하면 ‘어디서 왔어’라고 물어보고 ‘전주요, 전북이요’하면 ‘방 없다’고 해요. 공직 생활 때는 너무 출신 지역을 표출하면 불이익을 받을 수 있어 어떻게든 출신지를 숨겼죠. 그런 것을 지켜볼 때마다 착잡하면서 애향심이 더 생겼죠. 고향이 중요하고, 고향발전이 중요하다는 걸 느꼈죠. 그 이후로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죠.”

 

-전북출신으로 공직 생활이 순탄치만은 않았을 것 같은데요.

“호남 출신은 5공(共)초에 많이 도태됐는데, 그 때 나는 총리실 내 호남 공직자 대표격이다 보니 ‘사퇴권고 대상자’였죠. 그러나 사퇴할 이유가 없었어요. 능력이 없다거나 다른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지요.

호남 출신들은 ‘항상 조심해야 하고, 더 많은 노력과 능력 발휘를 해야 버틴다’는 식으로 살아왔죠. 그 당시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했겠어요. 그러나 극복했죠. 결국 자강(自强)입니다. 스스로 자기가 강해야 합니다. 강한 능력을 가지면 당하지 않는 거죠.”

그는 1979년 공직을 조기 마무리하고 유학을 계획했다가, 그의 능력이 평가돼 국무총리실 제1행정조정관(1급)으로 승진되면서 공직을 이어갔다.

 

-행정 못지 않게 체육계와도 인연이 깊습니다.

“5공(共)에 들어서면서 정부 차원에서 올림픽 유치 문제가 본격 논의됐는데, 앞서 박정희 대통령 때인 1979년에 이미 많은 조사 연구한터라 당시는 반 전문가가 되어 있었죠. 그래서 올림픽 얘기만 나오면 나를 찾았어요. 자연히 독보적인 경쟁력을 갖추게 됐죠. 그런 면에서 대단한 행운이랄 수 있죠.”

이후 그는 서울 올림픽유치단에 합류했고, 성공적인 대회 개최의 일등공신이 됐다.

퇴임 후 국민체육진흥공단 이사장(1998년), 한·일 월드컵 공동조직위원장(2002년), 제34대(2002년)·제36대(2005년) 대한체육회장과 대한올림픽위원회(KOC) 위원장(2002년)을 역임했다. 인천아시안게임조직위원장(2014년)과 무주세계태권도대회 조직위원회 공동위원장(2017년)도 맡았다.

 

-쉽지 않았을텐데, 공직 시절부터 전북 문제를 직접 챙기셨습니다.

“노태우 정부 시절 대통령 비서실 초대 행정수석을 맡으면서 ‘고향 발전, 어떻게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당시 사람 키우는 것, ‘전북 지사는 전북사람이 돼야겠다’는 생각부터 했죠. 이전까지는 타 지역 출신들이 전북지사로 임명됐는데, 문제는 도지사로 보낼 전북출신 차관급이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당시 경제기획원에 있던 강현욱 예산실장(1급)를 끌어올릴 수 밖에 없었죠.”

전북으로 내려간 강현욱 전 지사는 전북의 미래를 위해서는 물 문제가 중요하다며 용담댐 건설을 제안했다. 그러나 대통령 공약도 예산 부족으로 쩔쩔매고 있는 상황에서 공약도 아닌 사업에 1조 원 가량(초안)을 투입하기가 쉽지 않았다. 강 지사의 직전 상관이었던 경제부총리조차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을 정도였다. 이 전 장관이 막후에서 청와대와 경제기획원를 움직이면서 용담댐 사업은 극적으로 추진됐다.

 

-전북이 투지와 의지가 박약하다고 지적했는데, 어떤 점이 그렇습니까.

“총리를 모시고 지방 출장을 가면, 다른 지역에서는 건의사항이 7~8개씩 나오는데 전북은 고작 3개 정도예요. 그래서 ‘조금 더 건의를 내십시오’라고 요청하면 ‘총리께서 모처럼 오셨는데 부담드리면 되냐’고 그래요. 대통령을 모시고 가더라도 다른 지역은 건의하고도 또 들고 오는 적극성이 있는데, 전북은 없어요. 전북 공직자들의 보편적 기질인데, 소리를 못내요.”

 

-범도민 새만금추진위원장을 맡아 새만금특별법 개정을 추진할 때 가장 큰 걸림돌은 무엇이었습니까.

“당시 6대4의 비율이었던 농지와 산업용지의 비율을 거꾸로 바꿔야 하는데, 국회에서 발목이 잡혔죠. 법 개정을 가로막는 게 전남하고 경상도였죠. 서해안에 항만이 만들어지고 공단이 들어오면 전남과 부산 등이 타격을 받는다는 거죠. 전남과 경상도가 이해가 같으니까 반대하고 안 가는 것이었죠.”

당시 대선 후보로 MB가 새만금에 간다는 소식을 접하고 접촉을 시도했다. 마침 MB가 이 전 장관을 영입하려고 시도했던 때라 만남은 쉽게 이뤄졌다. 그리고 전북으로 향하던 KTX에서 법안 통과 약속을 받아냈다. 그러나 영입 제의는 완곡히 거절했다고 했다.

 

-태권도원 무주 유치의 공로자이기도 한데.

“무주는 원래 태권도원 후보지가 아니었죠. 경주로 거의 내정이 돼 있었어요. 그런데 무주가 동계올림픽 국내 후보지를 놓고 평창과의 경쟁에서 밀리면서 대안 마련이 필요했죠. 그 과정에서 대한체육회장인 나에게 비난의 화살이 쏟아져 지역에선 체육회장 화형식 등 난리가 났지. 나름 서운하더라고요. 그러던 중 태권도센터 이야기가 나와서 벼락같이 문체부 장관에 얘기해 무주로 유치했죠.”

그는 태권도원 유치 후 전북이 주도권을 갖고 건축물 건립과 사후 운영주체도 맡아야 하는데, 모두 양보하고 뒷전으로 물러나 있는게 아쉽다고 했다.

그는 2017년 무주 세계태권도선수권 대회 유치전에서도 나서 대회 유치에 커다란 활약을 했다.

 

그의 이야기는 ’전북 몫 찾기‘로 이어졌다.

 

-프로야구 쌍방울 구단 창단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데요.

“청와대 수석할 때 내가 만들어준거죠. 어떻게 보면 전주는 전라도 중심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광주 중심으로 가서 놓쳐버린거죠. 그래서 야구단이 전북에 하나 있어야겠다는 생각에 기업(스폰)을 찾았는데 모두 피합니다. 미원도 삼양사도. 그만두려던 차에 쌍방울이 나섰죠. 구단은 재벌급 규모가 돼야는데, 쌍방울 가지고는 안 되잖아요. 그래서 미원하고 합해서 공동 구단주로 해보라고 틀을 만들었죠. 미원은 나중에 빠져나갔죠.”

쌍방울 그룹의 부도로 구단이 해체된 후 김우중 전 회장을 접촉해 협상이 진행됐으나, 양측의 입장 차이로 최종 결렬됐다.

 

-프로야구 10구단 유치전에서도 나섰는데.

“그 때는 수원하고 경합을 벌였는데, 그 과정을 보면 전북의 문제점이 그대로 드러나 있죠. 수원은 정치권이 여·야 50명 정도되고, 볼륨도 크죠. 여·야가 엇비슷하게 구성돼 있어 지역 현안이 나오면 여·야가 모여서 대책회의를 하고 협의하죠. 반면 전북은 11명이 제 갈길입니다. 지역내에서도 정치권은 물론 시·군 간에도 협력이 안되는 거예요. 수원과 너무 비교됐죠.”

 

-지역 내 갈등은 새만금 현장에서도 보여지고 있습니다.

“행정 관할권을 놓고 자치단체간 다툼이 벌어지고 있는데, 새만금은 단일 특별행정구역으로 가야됩니다. 당연한 일인데도 자치단체 간에 난센스를 하고 있는 형국이죠. 정말 부끄러운 줄 알아야 됩니다. 큰 발전이 있어야 다 발전이 되죠. 새만금은 큰 그림이 나와야 합니다. 또 태양광을 놓고도 말이 많은데, 지엽적인 것 보다는 큰 방향을 그려야 합니다. 무리하게 할 거 없이 질서있게 미래지향적으로 구체안 만들어서 그 과실이 도민들에게 돌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전국 각 광역자치단체가 초광역경제권 통합에 대한 논의가 한창입니다.

“초광역 나오는데, 전북은 초광역은 고사하고 중광역도 못하잖아요. 전주·완주통합이라는 조그마한 통합 하나도 못하고. ‘아직도 멀었구나, 아직도 잠을 못 깨고 있구나’라는 생각입니다. 어디 통폐합에 끌려들어가 들러리 서다가 흡수되는, 광주·전남의 초광역에 들어가는, 전라도 변방으로 밀려나는 전북이 될 것 같아 걱정입니다. 특히 단합하고 협력하고 부당한 일에 대해서는 강한 소리도 낼 줄 알아야 하는데, 지금 같이 해서는 자기 몫도 못 찾고 항상 바닥에 머물 것 같습니다. 언론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언론의 어떤 역할을 의미한지.

”옛날 전라도 중심 역할에 대한 역사적 긍지나 자부심을 갖고 전기를 마련하도록 도민적 각성이 싹틀 수 있도록 해야 되는데, 이런 것을 불러일으키는게 언론입니다. 지역 대표 언론인 전북일보가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더불어 광주는 학생운동과 5·18 등으로 마치 민주화의 성지처럼 하는데, 사실은 동학의 전북이 그 원조이죠. 외세에 대항하고 민족의 자주, 자존을 세운 민주적 의식은 전북이 훨씬 큰 거죠. 우리가 그에 대한 자긍심을 가져야 하는데, 정리와 홍보가 약하니까 전부 광주가 가져갔죠. 우리가 좋은 소재를 제대로 살리지 못한 것입니다.”

 

-재경 전북기업인들 모임체인 ‘JB미래포럼’을 이끌고 있는 등 여전히 활발한 활동을 하고 계십니다.

“서로 협력하고, 정보 나누고, 도움이 되기 위한 것이죠. 그래서 ‘잘 되면, 고향을 생각해’라고 합니다. 무슨 정치적인 뜻이 있어서 그런게 아니라 고향 사람들 서로 만나서 얘기 나누고 협력할 거 있으면 협력하고, 단합할 수 있는 역할만 합니다.”

 

-전고·북중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장을 맡으셨습니다.

“전국 공립 고교 가운데 전주가 다섯번째인데, 앞서 100주년을 맞은 학교 가운데 기금을 100억 모금한 곳이 몇 군데 있었죠. 그것이 하나의 ‘100주년 100억원’이 됐죠.

전북도의 전국적 위상이 빈약하게 처져 있는데, 지역 대표인 전고마저 그러면 ‘역시구나’라고 생각할 것 같아서 무리해서라도 추진해야겠다고 생각했죠. 짧은 기간이라 큰 부담이었죠.

특히 부산도 100억 원, 서울고 100억 넘고, 경기는 100억 훨씬 넘고, 경북고도 100억, 큰일났더라고요.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아주 적극적인 참여가 이뤄져 100주년 3주를 남겨놓고 100억 원이 딱 찼습니다. 너무 감격해서 서울 올림픽 유치할 때 눈물 흘리고, 이번에 눈물 터뜨렸죠. 전북이 여러 면에서 처져 있지만 협력하고 단합하면 길은 있다고 봅니다.”

 

-지역 내에서는 전주고 역할에 대한 의견이 나뉩니다.

“전주고라고 특별한 뭐가 있나요. 옛날 말이지. 지금은 다 마음으로 나누는 것이죠. 이번 100주년도 ‘전주고만의 행사는 아니다. 도민들이 함께 하는 행사’라고 생각합니다. 100주년 성과가 전북의 위상을, 전북인의 긍지를 손상시키지 않은 것에 만족합니다.

더불어 도민들이 참여하는 학교인 만큼 조성된 장학금도 전주고만 주지 말고 전북에 우수한 학생들, 중·고교까지 지급하는 것으로 규정도 바뀌어서 시행하고 있죠. 우리 전북도가 작은 만큼 자꾸 단합과 협력, 그런 쪽으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연택 전 장관 이력

△ 1936년 고창 출생

△ 전주고-동국대 법학과-고려대 대학원

△ 1961 재건국민운동본부 조직관리 담당관(1961)

△ 국무총리실 제1행정조정관-대통령비서실 행정수석

△ 총무처 장관(1990)

△ 노동부 장관(1992)

△ 국민체육진흥공단 이사장(1998)

△ 2002 한일월드컵 조직위 공동조직위원장

△ 제24대 대한올림픽위원회(KOC) 위원장

△ 제34·36대 대한체육회 회장

△ 동아마라톤꿈나무재단 이사장(2006∼)

△ 국총회 회장(국무총리실 전·현직 모임)

/대담=김준호 기자·정리=김세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