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89) 겨울철 ‘난로회’와 온정

「야연」 조선시기 작자미상,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춥다. 그렇다 보니 따뜻한 장소를 찾게 된다. 이런 날 선조들은 아마도 온기 있는 아랫목이나 화롯가에서 몸을 녹였을 것이다. 그 중, 색다른 화롯가의 풍경으로 ‘난로회(煖爐會)’라는 모임이 있었다. 음력 10월 초하루에 시작하여 겨울철 추위를 쫓기 위해 양반사대부들이 모여 소고기를 구워 먹는 풍속이었다. 당시 농경사회인 조선에서 소는 농사에 필요한 귀한 존재인데, 소를 구워 먹는 모임이 있었으니 만경들판에서 소를 의지하며 농사를 짓던 농부들이 기막힐 노릇이었겠다.

그 난로회의 모습은 그림으로 생생하게 엿 볼 수 있는데, 술상을 옆에 두고 털방석에 자리한 기녀와 방한용 의복을 잔뜩 차려입은 양반들이 호기로운 표정으로 소고기를 구워 먹는 모습이 담겨있다. 난로회는 17세기 후반 즈음 중국에서 들여와 한양 양반사대부 사이에 퍼져나갔다가 18세기에 팔도로 퍼져 유행된 것으로 알려졌다.

난로회의 모임은 그림뿐 아니라 여러 문헌에서 그 흔적을 살펴볼 수 있는데, 『동국세시기』에는 “한양에서 화로에 숯불을 활활 피워 번철을 올려놓은 다음 소고기를 기름, 간장, 달걀, 파, 마늘, 고춧가루에 조리하여 구우면서 화롯가에 둘러앉아 먹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귀한 소를 구워 먹는 것이 조선 시기 겨울철 풍속이었다니 새삼스럽다.

 

김준근의 풍속화(좌)와 김홍도의 풍속화 부분사진(우)

우리 역사 안에서 소와 관련된 오래된 흔적으로 상고시대 부여는 가축을 귀하게 여겨 이를 상징하는 마가, 우가, 구가, 저가로 관직명을 지었다. 부여의 제사인 영고에서는 소나 사냥에서 잡은 동물을 제물로 바치고 나서 음식으로 먹었는데, 이는 신과 인간이 함께 먹고 공유하는 신성한 문화를 형성했다.

삼국시대 고구려는 벽화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농경을 주관하는 신의 모습으로 소를 그렸으며, 제를 지낸 후 먹는 고구려의 대표 음식인 ‘맥적(貊炙, 양념을 한 고기구이)’은 신과 공유하는 음식이었다가 왕이나 귀족들이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연회에서 먹게 되면서 잔치 음식이 되었다.

신라는 국가에서 기관을 설치하여 가축을 관리하고 포나 젓갈 등의 육류 가공 기술이 발달했다. 백제의 왕들은 특히 사슴을 신성시하여 제사를 지낼 때 사냥으로 잡은 사슴을 제물로 사용하였다. 그래서인지 부안의 조선 시기 특산품으로 알려진 희귀한 사슴 꼬리인 녹미 등 사슴고기의 명성은 오래전 역사 속에서 나온 것일 수 있겠다.

고려는 불교와 농사를 중시하여 육식이 절제되는 시기였다. 송나라 서긍이 지은 고려 견문록인 『고려도경』에 따르면 고려는 살생을 꺼리기 때문에 도축이 서툴러 고기 맛을 버린다고 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소고기는 귀한 음식으로 대접받으며 보양식이나 최고위층에게 바치는 고귀한 선물로 사용했으며, 우유는 왕이나 귀족들이 약용으로 즐겼다.

 

김홍도 사계풍속도(고기굽기) 프랑스 기메박물관 소장

조선은 농사를 중요시해 노동력에 필요한 소를 관리했다. 1398년(태조 7)에 소 도살을 금하는 우금령(牛禁令)을 내린 이후 처벌 규정을 마련하면서 지속적으로 우금령을 반포하였다. 처벌 내용을 보면 자기의 소를 도살한 자, 남의 소를 사서 도살한 자 순으로 형량이 무거웠다. 가장 큰 죄로 남의 소를 훔쳐 도살한 자는 교수형에 처하기도 했지만, 소 도살은 널리 자행되었다.

더러는 생전에 소고기를 먹고 싶어 하던 부모를 대접하지 못한 죄책감과 농사일을 돕던 소를 잡아먹는 것은 어질지 못한 행동이라고 여겼지만, 고려와 달리 불교의 영향이 적은 조선은 우금령을 어긴 자들이 많았고 특히, 양반들 사이에 소고기 선호가 높았다. 그들은 소고기를 가장 귀한 별미이자 보양식 재료로 여기며 소고기를 선물하거나 대접받는 것을 중히 여겼다. 따라서 제수용, 연회용, 접대용, 보양식으로 사용하였고, 임금의 신하에게 하사용으로 소고기를 내리고, 궁에서도 ‘난로회’를 연 기록도 남아 있으며, 장수를 한 영조의 식습관은 특이하게 사슴 꼬리와 우유로 만든 찬 타락죽을 겨울철에 즐긴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의 선비들은 특히 소 염통구이인 ‘우심적(牛心炙)’을 즐겼다. 우심은 소의 심장으로 마음을 담아 대접하는 것을 상징했다. 우심적은 진나라의 고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주의가 왕희지에게 존경의 마음을 담아 소의 염통을 구워 대접한 음식인지라 선비들의 지적 동경 대상이 된 것이다. 그래서인지 여러 기록과 선비들이 남긴 시문에서 우심적을 언급한 것을 찾아볼 수 있다.

우심적에 관한 문헌 기록

순창을 배경으로 한 『설공찬전』을 지은 채수는 부친상 중에도 우심적을 먹은 자라는 특이한 기록이 있으며, 정약용은 유배지인 강진까지 먼 길을 찾아온 친구 신종수에게 마음을 담은 우심적을 대접하지 못함을 안타까워하고는 “소염통을 구워먹는게 부추밭을 가꾸는 것보다 낫다”는 구절을 남겼다.

 

(왼) 장수한우 (사진=장수군 제공) / 기메박물관 소장된 김홍도 그림 모사작품 (민속박물관 소장)

이제 ‘소’하면, 농사일하는 소를 보기 어렵고 우심적으로 마음을 전하며 즐기지 못하지만, 명품 한우나 유명 식당의 맛있는 소고기가 생각난다. 하지만, 연말을 앞둔 우리는 조선 양반들의 겨울철 모임 같은 ‘난로회’는 커녕 애경사도 함께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요즘 들어 각자의 집 인터넷 공간에서 모여 음식을 먹는 랜선 모임이 유행이라고 한다. 어찌 되었건 이 상황을 잘 지내려면 면역력에 좋은 음식을 먹고 건강해야 한다. 또한, 코로나와 맞서 지치지 않는 마음의 근육도 키우며 어려운 이웃에게 힘을 건네고 온정을 나눠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