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한 편 읽는다고 세상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하다면 우리 사는 일이 왜 지지부진하겠는가! 세상의 철벽 앞에 시는 무기력하고 시인의 시 쓰기는 무모한 도전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시를 읽는 일은 우리가 세상의 벽만은 되지 않겠다는 버둥거림이 아닐까?
“젖은 서사는 아무리 구겨도/날개를 펴지 않는다”라는 시구를 읽다가 시집을 잠시 덮었다. 점심 무렵 우편물을 찾아왔으니 오후 서너 시쯤이었을 것이다. 9월이었고 맑았고 아무 일 없는 날이었다. 심심하기 그지없었던 날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무방비였던 나는 ‘젖은 서사’라는 말을 흠뻑 뒤집어써버렸다. 바야흐로 그날 오후가 온통 흥건해져버렸던 것이다. 이것이 김영 시인의 시 ‘사물들의 본적’을 만나게 된 정황이다.
“새벽마다 반송되는 나의 미래는/언제나 부러진 기억 쪽으로 수납된다”라는 시구는 저녁 어스름이 슬금할 무렵에 읽었다. 낮밤의 기수역에서 마음이 산란했는지도 모르겠다. 무턱대는 성격도 아닌데 그 구절을 덥석 잡아채고 말았다. “묵음은 모든 불안의 본적이다”라는 구절에 이르러 한번 더 마음이 삐끗했다. 시를 읽다보면 주춤거리며 말려드는 경우가 있는데, 이 시를 읽는 일이 그랬다. 이것이 김영 시인의 시 ‘일어서는 묵음’을 읽고 난 소회다.
김영 시인의 시집 <파이디아> 에서 두 편의 시를 먼저 풀어놓는 것은 공교롭게도 두 시가 존재의 ‘본적’을 다루고 있어서다. 본적은 존재의 근원을 확인하고자 하는 제도화된 형식이라는 것을 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대응되는 형식인 것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김영 시인은 ‘파이디아(paidia)’를 전면에 내세웠다. 소개하자면 ‘파이디아’는 무질서한 상황을 즐기는 아이들의 놀이 형식을 어원으로 삼고 있다. 제도화된 존재와 질서 없는 존재 사이에 어떤 연관이라도 있는 것일까? 파이디아>
이것을 해명하기 위해 시집을 꼼꼼 읽었고 곰곰 생각했다. “삶은 규칙 없는 놀이”(‘파이디아1-흐르거나 머물거나’)에 닿았다가 “기원이 다른 사유가 한 페이지에 머무르는 것은, 갈등을 부르는 존재 방식이었나 봐요”(‘파이디아2-숲이 되는’)를 짚은 후 “세상은 같은 문장을 다른 의미로 읽어주지요”(‘파이디아3-대성당’)에 다다라서야 간신히 이해할 수 있었다. 질서와 무질서, 규칙과 변칙이 사실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세상’이 인간 존재의 기원이라고 한다면, 그 세상은 질서 있고 규칙적인 ‘같은 문장’으로부터 무질서와 변칙으로 이루어진 ‘다른 의미’가 탄생하는 곳이었다. 하나의 뿌리(본적)에서 여러 갈래의 가지를 뻗어 탄생하는 것이 우리의 삶(존재)이라는 생각으로 시집 읽기를 갈무리했을 때는 밤이 깊어 있었다. 밤은 모든 존재의 본적처럼 살아 있는 것들을 흠뻑 빨아들이고 있었다.
이렇게 시를 읽는 일은 자주 나를 돌아보게 한다. 우리의 삶이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 우리의 시선이 어디를 겨냥해야 하는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시는 가장 인간적인 방식으로 견고한 세상의 벽과 맞선다. 김영 시인의 시집 <파이디아> 를 읽고 우리 인간의 ‘본적’이 인간 자체라는 깨달음을 얻었다면 소박한 것일까? 사소할지라도 새겨둘 만한 일이다. 시 읽는 일이 이렇다. 파이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