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제목이나 겉표지에 낚여 덜컥 사버릴 때가 있다. 책 펼치자마다 ‘아뿔사! 낚였군.’해도 이미 내 손에 책이 온 후……. 후회막급해도 소용없고, 책표지 뒷장 바코드 아래 책값을 두고두고 째려본 들 어쩌겠는가!
그 충동에 구입한 시집이 있었다. 『슬픔에도 주량이 있다면』은 한 치의 주저도 없이 사게 만들었다. 그리고 시집을 펴고 한 일은 목차를 보고 시를 찾았다. 목차 어디에도 없었다. 책을 잡으면 끝장을 보기도 전에 잠이 몰려오는 나를 단 한번에 ‘온읽기’를 시켜버렸다. 아주 고단수가 따로 없다. 처음에는 안 보이는 게 약이 올라 읽다, 나중에는 오기로 읽었다. 어쩜 그 말이 그 말인 셈이지만……. ‘콩나물 국밥’에 다진 청양고추 넣어 말아버린 것을 어쨌든 찾았다. 나중에 들은 후문이지만, 출판사 대표가 제안해 나온 제목이란다. 박수서 시는 『슬픔에도 주량이 있다면』처럼 기막힌 시어들이 숨어있다. 시인의 모습과 많이 닮았다.
어느 날 하루는 박 시인이 철 한 수저를 먹었는지 뜬금없이 내게 물었다.
“형, 나하고 친해서 사람들한테 욕먹지?”
난 망설임 없이 냅다 대답했다.
“그래!”
박수서는 별종 중에 별종이다. 나는 곁에 별종 하나 있는 게 좋다. ‘뽕작시의 선두주자’, ‘자칭 삼류시인’, ‘고독한 미식가를 사랑하는 고독한 미식가’다. 어찌 보면 시인이 만든 한 장르이다. 사뭇 기괴한 물건이 따로 없지만 이 별종이 나는 좋다.
서문에 일출을 보러갔다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라면 한 그릇 먹었더니 해가 중천에 떴더라 하면서 그렇게 한눈팔다 시를 잃었다고 말한다. 박수서는 어쩌면 인생에 서 먹을 라면 한 그릇이 너무 많은지 모른다. 그래서 매일 ‘삶이란 무엇이냐?’하며 징징거린다. 그런 식으로 시를 갈급하고 있다는 속마음을 둘러대는지 모른다. 『빈집』을 보면 박수서 자신을 보는 것 같다. 시를 못 쓰고 막걸리를 마실까, 소주를 마실까 고민할 때면 빈집처럼 부산해진다. 정신을 빼놓는다. 박수서 시인은 시 쓸 때는 세상 진중하다. 나는 가끔 몸살 난 박수서를 보면 쌍화탕 한 병 주듯 ‘시 써라!’ 한다.
시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익어갈지 감나무에게 감히 물을 수 있었을까! 자신이 덜 익었음을 진정으로 깨닫고 가기 쉽겠는가? 『거미』시를 읽고 누군가 말했다.
“기죽고 힘들어하지 마시게나. 다 보기 나름이라네.”
요즘은 매일 ‘위기’와 동거하는 세상 같다. 다들 힘내자는 말 대신『거미』의 시구로 마무리 하련다.
‘죽지 못하고 끝까지 줄 위에서 버티는 것은
……스스로 거미줄을 먹어치울망정 세상의 먹이가 되지 않기 위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