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들의 멋과 풍류가 곳곳에 오롯이 남아 있는 고장인 전주를 흔히들 양반의 도시라고 부른다. 전통과 문화가 살아 숨쉬는 곳인만큼 양반이라고 하든 예술교육이라고 하든 이러한 칭송의 언어가 당연해 보인다. 도시 전체에서 느껴지는 이미지만 그런 게 아니다. 도시가 품고 있는 각 고을들의 이름은 더욱 더 매력적이다. 도시마다 나름 예쁜 이름이 없진 않겠지만 전주는 아름다운 동네 이름이 너무나 많다. 점잖은 동네 냄새가 물씬 풍기는 도덕동, 우아한 사람들만 살 것 같은 우아동, 만사 태평이 떠오르는 태평동, 축복이 넘치는 팔복동, 마음이 평온해지는 평화동, 효심이 엿보이는 효자동이 그렇다. 그런데 유독 다가오는 이름이 팔복동이다. 오복만 있어도 삶이 차고도 넘칠 텐데 팔복이라고 하면 이 얼마나 엄청난 축복인가?
그래서 팔복 즉 여덟 가지 복을 일일이 찾아서 찬찬히 훑어보니 좀 난해하다. 가장 첫번째 나오는 문장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것이다. 떵떵거릴 정도의 부자라 해도 시원치 않을 마당에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는 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그래서 영어 성경을 찾아보니 ‘Blessed are the poor in spirit.’ 이라고 되어 있다. 성경적 해석은 좀 다를 수 있지만, 직역하면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 행복하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해석이 쉽지 않아 끙끙대던 와중에, 한 세기를 넘겨 사신 김형석 교수님의 말씀을 우연히 접했다. 행복에 대한 질문에 ‘절대로 행복할 수 없는 두 부류’로 답하신 내용이다. 첫번째 부류는 정신적 가치를 모르는 사람으로 돈과 권력, 혹은 명예욕을 좇는 사람이고, 두번째 부류는 자기만을 위해 사는 이기주의자라는 것이다. 곱씹어 볼수록 의미심장한 말씀이다. 마음이 헛된 욕심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은 만족할 줄 모를 뿐만 아니라 주위를 둘러보는 아량도 여유도 없다. 당연히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주의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부류는 일시적 행복감은 맛볼지 모르나 지속적인 행복을 누리기는 어렵다. 하지만 마음을 비워 그러한 욕심을 버리고 나면 전혀 다른 삶이 시작된다. 가진 게 적으니 가난해 보이기는 하겠지만, 그 비운 것으로 어려운 이를 도울 수 있게 되니 행복감이 밀려 올 것만 같다.
전주라는 말에서 떠오르는 또 다른 이미지는 얼굴 없는 천사다. 얼굴과 이름도 밝히지 않은 채 스무 한 해 동안 한번도 거르지 않고, 어려운 이웃들에게 전해주라며 7억원이상을 노송동주민센터에 맡겨온 기부천사 말이다. 연말마다 전주시민 뿐만 아니라 전국민들의 마음을 훈훈하게 해주고 있어서, 고교시절 그 인근에 살았던 것을 주위에 은연중 자랑하게 된다. 부자도 아닌 그 천사가 ?‘기부하는 게 마음이 편하다’고 했다는데,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는 것과 일맥상통하지 않나 생각한다. 그 기부천사가 덧붙인 말이 있다. 있는 사람들이 좀 내놔야 나라가 발전되고 그러지 않겠냐고 말이다. 그 천사의 말이 주효했는지 이달 들어 김범수 카카오 의장이 10조로 추산되는 재산의 절반 이상을, 이어서 배민 창업자 김봉진 의장 부부도 재산의 절반 이상을 기부하기로 했다. 이들은 팔복 중 그 첫번째 복을 이미 받은 것 같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영어 단어 중에서 ‘give’를 매우 좋아한다. 발음도 우리말 기부와 비슷하다. 그런데 이제 더 좋은 단어가 생각났다. Donate이다. 혹 넘칠 정도로 가지고 있는 재물이 있다면 눈 딱 감고 ‘돈, 에잇!’하고 외치면서 어려운 이웃에게 건네 보자. 그러면 ‘에잇, 복!’하면서 하늘에서 팔복이 쏟아져 내릴지도 모르니까. /이강만 한화에스테이트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