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남부 사해(死海)에 인접한 마사다 항전지는 이스라엘 민족의 자긍심이자 저항정신의 상징이다. AD 70년 로마군대에 예루살렘이 함락되자 유대인 열심당원과 가족 960명이 천혜의 요새인 마사다로 이주해 최후에 항전을 벌였던 전적지다. 깎아지른 절벽 위에 위치한 마사다는 난공불락의 지형으로 로마 제10군단이 2년 넘게 포위 공격을 시도했지만 점령하지 못했다. 이에 로마군이 유대인을 동원해 수백m 높이의 공격용 경사로를 구축하고 마지막 공격에 나서려던 때 저항군과 가족들은 모두 집단 자결을 선택하고 만다. 그들은 로마군의 노예로 사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며 저항군이 먼저 자기 가족을 죽이고 다시 모여 열 사람씩 조를 짜서 한 사람이 아홉 명을 죽이는 방식으로 죽음의 의식을 치렀다. 그렇게 남은 최후의 한 사람은 성에 불을 지른 후 자결했다.
마사다 항전지는 1963년~1965년 사이에 발굴돼 200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고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관광지가 됐다. 오늘날 이스라엘 사관생도와 장병들은 모두 마사다 항전지에서 임관선서와 훈련 수료식을 가질 정도로 이스라엘 민족혼의 상징이 됐다.
우리 지역에도 이스라엘의 마사다 항전지와 같은 임진왜란 전적지가 있다. 완주 소양과 진안 부귀 일대에 있는 웅치 전적지다. 웅치 전적지는 1592년 8월 14일(음력 7월 8일) 관군과 의병 그리고 지역민 등 3000여 명이 1만여 명의 왜군에 맞서 모두 죽음으로 결사 항전한 곳이다. 비록 전투에선 패배했지만 전주성과 호남을 지켜낸 최후의 보루가 됐고 결과적으로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단초가 됐다.
하지만 웅치 전적지는 오랫동안 역사 속에 묻힌 채 조명받지 못해왔다. 임진왜란 3대 대첩 못지않은 역사적 전사적 중요성에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해왔던 것. 그동안 완주·진안지역 주민 중심으로 면 단위 기념행사를 치르는 정도에 불과했다. 최근에서야 지역 주민과 향토사학계, 언론을 중심으로 기념사업과 재조명 작업이 활발히 진행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전라북도에선 국가 사적지 지정을 위한 절차에 들어갔다. 웅치 전적지가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면 보다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조사를 실시하고 기념관 건립과 역사탐방길 조성 등 다양한 기념사업을 추진하게 된다.
웅치 전적지와 함께 완주 운주와 충남 금산 일대의 이치 전적지도 사적지 지정에 나서야 한다. 이름 없는 4백여 명의 농민이 관군과 함께 왜군 1만여 명과 맞서 장렬히 순절한 역사의 현장이다. 웅치·이치 전적지는 위국 충절의 상징이자 우리 민족혼의 표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