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한은 기원전 3∼2세기경에 익산을 중심으로 만경강유역에서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성립되었음이 문헌과 고고학적인 자료에서 확인되고 있다. 이 무렵 중국 중원지방에서는 진나라가 패권을 잡았던 전국시대가 끝나고 오늘날 중화민족 정체성의 근간이 되는 한나라가 유방에 의해 서안지역 일대에 건국되었다. 그런데 한강 이남의 대표적인 정치체인 마한이 성립, 성장하는 시기에 중국 중원의 한나라와 교류의 증거들이 발견되고 있어 두 중심 지역 간의 교류를 살필 수 있게 된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진한조에 보면, “진한은 마한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노인들이 대대로 전하여 말하기를 ‘우리들은 옛날 진나라의 고역을 피하여 한(韓)국으로 왔는데, 마한이 동쪽 땅을 분할하여 우리에게 주었다’ 그들의 말은 마한과 다르다 ....(후략)” 라고 적고 있다. 또한 한조에는 “후한(後漢)의 환제·영제 말기에는 한(韓)과 예(濊)가 강성하여 한(漢)의 군현이 제대로 통제가 되지 않아 군현의 백성들이 한(韓)으로 유입되었다”라 적고 있다. 이 기록을 통해 중국 전국시대부터 한나라에 이르기까지 많은 유이민들이 마한 지역으로 이주해 왔으며, 간접적으로는 교류가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는데, 고고학적인 유물에서도 교류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1975년, 전주에서 김제로 넘어가는 도로변 완주군 상림리(현 전주시 완산구 상림동)에서 묘목을 캐다가 26자루의 중국식 동검이 발견되었다. 이 동검은 비파형이나 세형동검과 달리 칼날이 직선적이며, 칼날과 함께 일체형으로 주조된 손잡이의 중간에는 마디모양의 돌기가 있는 점이 특징이다. 검의 길이는 45cm∼47cm로 다양하기 때문에 동일한 용범(거푸집)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특히 사용흔이 없기 때문에 아직 유통 이전에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최근 자연과학적 분석결과에 따르면, 대부분 한반도산 원료를 사용한 것으로 밝혀지고 있어 중국에서 건너온 장인에 의해 제작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1987년에는 익산 평장리에서 농로를 개설하는 과정에서 세형동검 2점, 동모, 동과, 동경 파편이 발견되었는데, 토광묘로 추정되는 유구는 이미 완전하게 파괴된 상태였다. 그래도 조심스럽게 주변을 정리한 결과, 구름무늬 바탕에 풀잎과 이무기로 장식한 청동거울 곧 「雲地四葉四?銅鏡」이 작은 파편으로 수습되었다. 이 동경은 복원 결과, 직경 13.4cm 정도이며 전한(前漢) 이른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최근 익산 신흥정수장의 북서쪽에 형성된 장자산의 서쪽과 남쪽 능선 일원의 지표조사 과정에서 진나라 시황제 때부터 전한시대(기원전 118년)까지 주조된 동전인 반량전(半兩錢) 2점이 발견되었다. 동전의 전체적인 형태는 원형의 외격에 살짝 둥근 테두리가 형성되어 있으며, 방형의 내곽이 뚫려있다. 부식이 심한 편이이어서 ‘半’자의 일부는 부식으로 훼손되었으나 ‘兩’자는 비교적 명확하게 확인된다. 반량전의 외곽 직경은 각각 2.35cm, 2.45㎝, 내곽 폭은 각각 0.8cm, 0.85㎝로서 거의 같은 크기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다양한 종류의 중국이나 일본제 유물이 발견되고 있기 때문에 이들 자료를 통해 마한은 성립 이후 성장과정에서 활발하게 대외교류 활동을 해 왔음을 읽어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