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동신발은 뒷부분이 포개어진 상태로 노출되었고, 우측 신발 내부에서 직물과 함께 뼈가 확인됨으로서 착장한 상태로 부장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신발의 길이는 32㎝, 너비 10.7㎝, 최대 높이 11.9㎝로 계측되지만, 양측의 신발이 약간의 차이가 있다.
먼저 제작수법을 보면 금동제 판을 목깃, 좌우 측판, 바닥으로 나누어 결구하고 있다. 양 측판 상부 안쪽으로 높이 2cm의 목깃 판을 세우고 그 둘레에 9개의 리벳을 박아 고청하였다. 신발의 앞부분 곧 콧등에 해당하는 곳에는 4개의 리벳으로 양 측판을 겹쳐 결합하고 있으며, 뒷축 부분에도 역시 양 측판을 겹쳐 3개의 리벳을 상하로 고정하고 있다. 그리고 양 측판의 하단은 둥글게 접어 그 안에 바닥판을 넣어 받칠 수 있도록 한 후 양측에 각각 4개씩 작은 리벳으로 고정하고 있다.
이 금동신발의 가장 큰 특징은 목깃을 제외하고는 전체적으로 투조로 구획하고 수많은 상서스러운 동물을 화려하게 배치하고 있는 점이다. 양 측판을 보면 상·중·하 3단으로 문양대를 구획했는데, 상하에는 풀 혹은 구름으로 추정되는 문양을 반복적으로 배치하고 있다. 3단 가운데 중간의 문양대가 중심을 이루고 있는데, 기본적으로 중앙 부분에 귀갑문 곧 육각형으로 구분하고 상하에 반육각형의 문양대를 형성하여 3단으로 구분된다. 상하 반육각형의 내부에는 새(오리)를 비롯한 동물이 배치되어 있다. 또한 귀갑문 내에는 용과 봉황, 인면조와 쌍조문 등이 입체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뒷축 부분에는 양 측판을 결합하여 형성된 3중의 원형 구획 안에 화염문을 투조로 장식하고 있다. 한편 바닥에는 앞에서 뒤쪽으로 4개+5개+5개+4개의 원형 구획을 한 후 각각 6엽의 꽃무늬로 장식하고 중앙에 징(스파이크)를 18개 부착하였다. 원형 구획의 중앙 부분에는 힘찬 용무늬로 장식하고 뒷꿈치 부분에는 역사상을, 앞부분에는 귀면상을 배치하고 있다. 그리고 가장자리에는 양 측판의 상단과 같은 문양을 투조로 장식하고 있다.
금동신발은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그리고 일본에서도 발견되고 있는 유물로서 각각의 특징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 가운데에서도 봉덕리 금동신발은 가장 예술적 가치뿐만 아니라 문양의 내용에서도 상서스럽고 신비적인 문양을 입체감 있게 표현한 점에서 최고의 작품으로 꼽힌다.
백제의 영역에서 발견되는 금동신발의 성격에 대해서는 주로 백제 중앙에서 사여를 통한 지방통치의 일환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지만 현지에서 제작했을 가능성에 대한 견해도 있다. 다만 이러한 금동신발을 착장하고 매장된 피장자의 신분은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최고지배자였을 것임은 쉽게 짐작된다. 고창 봉덕리 고분의 구조나 금동신발을 비롯한 출토유물에서 백제시대까지 마한 모로비리국 전통을 이어받았던 지역 수장의 세력을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