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원의 행복

이강만 한화에스테이트 대표

이강만 한화에스테이트 대표

얼마 전 일이다. 가족이 함께한 휴일 점심에 마땅히 먹고 싶은 음식도 없고 해서 가볍게 라면이나 끓여 먹자고 의견이 모아졌다. 흔히 있을 수 있는, 누가 라면을 끓일 것인지에 대한 논란은 없었다. 아내보다 라면을 더 맛있게 조리하는 법을 아는 아들이 있고, 그가 이를 즐겨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정작 라면이 집 안에 하나도 없었다. 편한 복장으로 집 안에서 휴식을 취하는 휴일에는 직선거리 100m 안팎의 마트 가는 일도 꽤 귀찮은 일이다. 한동안 서로 눈치만 보고 있다가 마침내 무던함이 적은 아내가 말을 꺼낸다.

“아들, 라면 좀 사와. 라면은 내가 끓일게” 평소 같으면 두말없이 현관문을 나설 둘째 아들에게서 뜻밖의 반응이 나온다.

“내가 라면 사오는 사람이야?” 꼬리 억양을 세게 올린 대답이다. 아니, 반항 섞인 반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계속 침묵하다가는 폭탄 돌리기 희생양이 될 것을 잘 아는 필자가 드디어 나섰다.

“라면 사오면 내가 만원 줄게”

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내의 표정이 바뀐다. “아들, 됐다. 내가 사올게”

거의 동시에 아들은 엄마 앞을 가로막는다. 그리고는 똑 같은 대사를 아까와는 전혀 달리 꼬리 억양을 내리며 “내가 라면 사오는 사람이야~~”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해맑은 미소를 보이면서. 만원의 위력을 절감하는 순간이었다. 자칫 심부름을 두고 얼굴을 붉힐 상황에서 만원으로 인해 평화롭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바뀐 것이다. 만원이 가져다 준 소소한 행복이다.

2000년대 초에 시작하여 꽤 오랜 기간 꾸준한 시청률을 기록하며 잔잔한 재미를 주었던 ‘만원의 행복’이라는 예능프로그램이 있었다. 스타급 연예인들이 출연하여 만원으로 일주일 버텨내는 과정을 보여준 것인데 나름 신선한 기획이었다. 흔히들 연예인은 사치스럽다는 인식이 강한 시절이라 연예인들의 조금은 망가진(?) 모습을 보는 것이 인기의 비결이었을지도 모른다. 일반인들의 편견을 깨보겠다는 기획 의도에 부응하듯 출연진들은 자신들의 삶 가운데 알뜰하고 진솔한 모습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최대한 노력을 했었고, 그 결과 5년 가까이 장수한 프로그램이 된 것이다. 물론 억지스러운 면이 없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예능프로그램 속성상 일정 부분 연출된 것이라 100% 실제 상황이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만원으로 하루 버티기도 벅찰 텐데 일주일을 버틴다는 것이 가능하냐는 논란은 그때도 있었고, 현재 물가로 따져보건대 편법이 동원되지 않는 한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데 말이다. 이러한 논란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만원이라는 환전 가치가 우리에게 어떠한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을까?’이다.

필자는 매월 적게는 2~7만원씩, 그리고 좀 큰 금액을 각각 다양한 곳에 기부하고 있다. 통장에서 해당 금액이 빠져나갈 때마다 아깝다는 생각보다는 그 금액이 누군가의 행복에 기여할 것이란 기대로 설렌다. 실제로 그것이 쓰인 곳에서의 행복을 함께 나누기도 한다. 지난 칼럼에서 언급했던 봉사 나눔의 ‘미생이야기’모임이 그렇다. 그동안 친목 모임처럼 운영되어 왔는데 어제 주무관청에서 설립을 허가함에 따라 정식 사단법인으로 출발하게 되었다. 법인은 이제 소수의 고액 기부자가 아닌, 월 5천원 또는 만원을 후원하는 다수의 후원자 그리고 재능 기부자의 봉사로 운영될 예정이다. 사단법인 설립 소식으로 필자의 지인들이 긴장할 필요는 없다. 만원 한 장이면 일주일, 아니 한 달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곧 알게 될 것이니 말이다. 그러고 보면 종영된 지 15년이 더 지난 그 프로그램을 소환하고 이를 곰곰이 생각해보는 기회를 가진 것이 우연은 아닌 것 같다./ 이강만 한화에스테이트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