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명예를 되찾을 수 있게 국가유공자 선정범위를 세분화해 폭을 넓혀줬으면 합니다.”
1940년 일제치하에서 고 허재경 씨는 전국에서 문맹자들을 모아 한글을 가르치는 야학을 열었다. ‘배워야 나라를 구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던 허 씨는 1년4개월간 호롱불빛을 가리고 일경의 눈을 피해 몰래 한글을 가르쳤다. 그러던 중 일경은 허 씨가 야학을 통해 한글을 가르친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야학을 덮쳤다. 다행히 허 씨는 인근 마을에 있어 붙잡히지 않았다. 일경이 허 씨를 찾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그는 한국을 떠나 만주로 피신했다.
허 씨의 나라를 되찾겠다는 운동은 만주에서도 계속됐다. ‘백의(白衣)민족단’을 조직했다. 백의민족단은 흰옷을 입고 활동했으며 후원금을 모금하고 하천의 사금을 채취·판매한 수익으로 매달 독립군에게 후원금을 전달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광복을 맞자 허 씨는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허 씨는 지난날의 한글야학원생과 함께 버려진 하천변에 방천둑을 쌓아 농경지를 만들고 공평하게 땅을 나눠가졌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한 후 1953년 10월 빨치산 부대가 허 씨의 마을을 습격했다. 빨치산 부대는 허씨를 연행해갔다. 지주(地主)라는 이유였다. 허씨는 빨치산이 쏜 총탄에 숨졌다. 그의 나이 36세였다.
그의 명예는 지난 2019년이 되어서야 조금이나마 회복됐다. 광복회 전북지부가 발간한 ‘전북독립운동열전’에 이름 없는 독립운동가로 등재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가보훈처는 허 씨에 대해 독립유공자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독립운동유공을 입증할만한 증거자료가 없어서다.
허 씨의 아들인 허호석 전북시인협회 고문은 “아버지의 독립운동 근거는 증거자료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독립유공자 판정을 받지 못했다”면서 “수십년 전 일제치하에 숨어살던 유공자는 증거자료가 과연 얼마나 있을지 의문”이라고 토로했다.
이어 “독립유공자 선정에 대해 국가유공자로만 한정할 것이 아니라 도 유공자, 시·군 명예자 등 등급을 나눠 폭 넓게 독립운동유공자로 선정해야 한다”면서 “유공자 선정의 문턱을 낮춰줄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