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오은숙 소설가 - 이병천 ‘홀리데이’

심신이 피로했던 어느 날 『홀리데이』를 읽었다. 이 책은 2001년 10월에 출간된 이병천 작가의 두 번째 소설집이다. 표제작인 「홀리데이」를 비롯해 11편의 소설이 실렸다.

실제 있었던 일을 소재로 한 「홀리데이」와 「백조들 노래하며 죽다」, 바둑을 소재로 한 「검은 달 흰 구름」은 출처가 흐릿하지만, 언젠가 읽은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는 문장이 이어질 때마다 아련하게 잡히는 이미지를 설명할 길 없다. 소설 미학이 명쾌하게 드러난 「검은 달 흰 구름」과 「백조들 노래하며 죽다」는 제목마저 선연했다. 문예지가 아니라면 소설집에서 본 듯하였지만, 언제, 어디서 만났는지 알 수 없었다. 오래전이라는 것 말고는 뚜렷한 것이 없어 처음인 듯 다시 읽었다. 좋은 작품을 읽어도 기억하지 못 하는 일이 종종 있으므로 별일 아닌 듯 읽어나갔는데 오래전 흘려보냈던 작가의 이름 석 자가 더 오래된 기억 저편에서 살아났다.

삼십 년도 전인 고등학생 시절 수업 시간이었다. 몇 학년 때인지, 어떤 과목인지 역시 뚜렷하지 않지만, “전주에도 이병천이라는 걸출한 소설가가 있다.”라는 말을 들었다. 그런 말에도 그의 소설을 찾아볼 엄두는 내지 못하였다. 오랜 시간 이름조차 묻어 두었던 건 ‘걸출한’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때 나는 짧은 순간 자부심이 일었고 가슴 속이 빛으로 물들었다. 소녀의 마음은 ‘비단 구두 사가지고 오는 오빠가 있다’, 하는 마음과 닮았다.

「우리들 사이버 키드」는 미성년과 사이버상에서 벌이는 성적 일탈이 최소한 도덕적일 수 있다고 믿는 화자의 태도가 중년 남성이 갖는 롤리타적 판타지를 그대로 보여주었다. 돈 많은 친구 경수와 거래 아닌 거래를 하게 되는 나의 심리가 드러난 「그건 쉬운 일이 아니지」는 연륜에서 묻어나는 재미가 있었고, 「삼각관계에 대한 한 믿음」, 「그 집 앞 은행나무」, 「가보지 못한 길」 또한 나름의 정서를 느낄 수 있었다.

단편소설집 『홀리데이』를 읽고 난 뒤 ‘현실 밀착형 글쓰기’와 ‘젊음’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현실 밀착형 글쓰기는 일정 부분 납득할 수 있었으나, 젊음이라는 키워드는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참신하고 젊은 감각이라고 하기에는 현실에서 벌어진 사건들의 차용이 많았고 그렇기에 시대성은 있으나 오래된 이야기일 수밖에 없었다. 박진감 있는 서사로 끌어가는 것은 아니었으나, 정갈하고 감칠맛이 도는 문장은 경쾌했다. 그런데 어째서 ‘젊음’이라는 단어가 맴도는 것일까. 참말로 오빠 같은 책이네. 고심 끝에 나도 모르게 뱉은 말이었다.

서평을 쓰기 전에 용기를 내었다. 한때는 모범생이었으나 남루한 삶을 꾸려가는 나의 오빠, 가치관이 다르다는 이유로 연락 끊고 지냈던 오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같은 작가가 쓴 책이라도 책마다 느낌이 다를 것이다. 같은 책이라도 읽는 이마다 느낌이 다르듯. 어떤 책은 열정을 품은 사랑 같고 어떤 책은 헤어진 연인 같고 또 어떤 책들은 동생이나 친구, 스승 같은 느낌도 들 것이다. 내게 있어 이병천 작가의 『홀리데이』는 일 년에 한 번도 보지 못하지만 살아 있다는 자체로 든든하면서 아리는 오빠 같다. 어떤 독자에게는 형님 같은 책일 수도 있겠다. 『홀리데이』 속에는 오랜 시간을 함께 뒹굴고 다투다 쌓은 정 만큼이나 끊어내지 못하는 문학의 향기가 있다.

오빠나 형님이 보고픈 날 꺼내 읽어도 좋은 책. 책장에 꽂아놓고 읽지 못한대도 위안이 되는 책. 어린 친구들에게는 할아버지 같은 책일 수도 있겠으나 단편소설집 『홀리데이』를 일단 한 번 사놓고 문학이 가족으로 변하는 순간을 맞이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