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은 시 쓰기가 즐거워야 하는데 고통을 말한다. 시 쓰는 일이 뼈를 깎고 피를 말리는 일이라 익히 들었다. 그러나 시적 상상이나 경험, 반짝이는 에스프리(esprit)로 시를 완성했을 때 희열이나 보람은 고통을 치를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어린시절 평범한 농가에서 태어나 가사를 돕는 일은 소를 끌고 다니며 풀을 먹이는 일이었다. 그런 과정에서 자연과 친해지고 사색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중학교 때는 문예반장이 되어 책과 가까이하였다. 고등학교 때는 하숙 생활을 하며 외로움을 낙서로 끄적이곤 했다. 그 후 교지에 작품을 게재하기 위해서 낙서한 것을 정리해 시인이신 조두현 선생님께 보여드렸다.
활자화 된 작품을 보니 묘한 흥분이 일었다. 이런 계기로 대학 시절에 문학 동아리 활동을 하였다. 이동렬 교수의 불문학 시간에는 스탕달, 말라르메, 보들레르, 랭보 등을 접하였다. 전채린 교수님이 ‘청춘은 연애할 때 빛난다.’라는 말씀에 행여 앙드레 지드의‘무상주의’에 청춘의 특별함이 있을 듯하여 그의 작품 좁은 문’, ‘교황청의 지하도’‘전원 교향곡’ ‘배덕자’등에 빠지기도 했다.
이후 사회에 나와 ‘전북문학’에 작품을 게재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어느날 정기총회에 참석했는데 ‘미등단 자에게 투표권을 주느니 마느니’ 논란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등단에 무관심했던 나는 ‘시가 좋아 시 쓰면 시인이지.’ 하는 지론으로 등단을 결심했다. 그런데 문덕수 교수님이 초회는 추천을 해주셨지만, 이후 수년 동안은 천료를 해주시지 않고 칭찬보다는 질책을 더 하셨다. 이를 수련의 과정아라는 생각을 못한 나는 포기를 할까도 생각했지만, 끝까지 인내하며 도전하여 1987년 초에 추천이 완료 되었다.
이후 전국 일곱 명의 시인들이 의기투합하여 「칠요시」라는 동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때 구상 선생님을 뵙게 되었는데 "詩는 말씀 言에 절 寺로 이루어졌다 하시면서, 절에서처럼 경건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시를 대하라고 당부하셨다.
어느 선배 시인께서 "글이 좋은데 사람이 나쁜 사람’, ‘글은 별로인데 사람이 좋은 사람’, 글도 좋고 사람도 좋은 사람‘으로 구성된 것이 시단이라고 말씀하시기에 나는 과연 어디에 속할까?라고 자문을 해본 적이 있었다.
릴케는 ‘시를 쓰지 않으면 살아있는 이유를 찾을 수 없다.’라고 했다. 시를 쓰는 고통 자체가 삶의 기쁨이라는 것이다. 시가 일정한 틀로 정해져 있거나,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한다는 법칙은 없다. 시 쓰기 기법 등을 말하는 책은 ‘시 창작 이론의 기본서’일 뿐이다. 리처드 바크까 쓴 「갈매기의 꿈」에서 갈매기 조나단이 어려운 한계를 넘어 고속비행에 성공한다. 부단한 노력과 고행을 거쳐 꿈을 이룬 것이다. 시인도 이와 같을 것이다.
꼭 시인이 되겠다는 생각 없이 문학의 길로 접어들었지만, 어느새 숙명적으로 시와 동반자가 되었다. 혼자 걷는 길을 같이 가며 삶의 무게를 나누는 시, 언제든지 안식처가 되고 처진 어깨를 토닥거려 주는 시,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고 그리우면 대상이 되어주는 시, 긴 여정을 서로 다독거리며 나는 오늘도 기의 길을 향하고 있다. /전길중
△ 전길중은 1987년 <시문학> 으로 등단하여 한국문협 감사, 한국 문학신문 편집국장, 전북문인협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한국문학 백년상, 전북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안경 너머 그대 눈빛』,『그녀의 입에 숲이 산다』 등 7권의 시집이 있다. 시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