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책인 「삼국지」에는 마한과 관련하여 54개 소국의 국명과 아울러 대국은 만여가, 소국은 수천가로서 총 십여만호나 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까지 고고학적으로 밝혀진 바에 의하면, 마한의 공간적 범위가 경기, 충청, 전라지역에 해당하기 때문에 마한의 소국들도 이 지역 내에 자리하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각 지역에는 마한 성립과 관련되는 조기단계의 토광묘에서부터 마한의 발전기에 확산되는 분구묘계통의 분묘들이 광범위하게 연속적으로 축조되어 왔다. 또한 마한의 정치·문화 중심지였던 지역의 경우에는 백제에 편입된 이후에도 마한 분구묘의 전통이 기층문화로서 지속적으로 축조되어 왔다. 그러나 『삼국지』에 기록되어 있는 마한 소국이 실제로 어느 지역에 위치했었는지에 대해서는 연구자에 따라 각각의 견해가 매우 달라 소국의 구체적인 실상에 대한 접근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마한의 소국에 대한 위치는 주로 지명의 음운학적인 유사성에 따라 비정되었거나, 역사서에 기록된 국명들이 북에서 남으로 위치한 순서에 의해 기록되었을 것이라는 전제에서 추정되어 왔다. 이에 따르면 전라북도에는 20여개의 마한 소국이 위치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국명을 음운학적인 방법만으로는 위치를 확증하기 어렵고, 견해 차이도 심해 마한 소국의 정확한 위치를 특정하기에는 여전히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연구자들 사이에 견해가 일치된 전라북도의 마한 소국을 보면, 고창의 모로비리국(牟盧卑離國)을 비롯해서 익산 함열의 감해국(感奚國)과 김제의 벽비리국(闢卑離國)을 들 수 있다. 다음으로 다수의 의견이 일치하는 곳은 부안의 지반국(支半國)과 정읍 고부의 구소국(狗素國)을 들 수 있다. 이외에 군산 회미의 만로국(萬盧國)과 익산의 건마국(乾馬國), 그리고 정읍의 초산도비리국(楚山塗卑離國)과 전주의 불사분사국(不斯?邪國) 등도 2명 정도의 일치된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나머지 11곳의 마한 소국위치 비정은 학자들 마다 다른 견해를 제시하고 있어 문헌자료 분석의 한계를 실감하게 한다.
따라서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고고학적인 자료인 분묘와 생활유적을 활용하여 밀집도에 따라 소국의 위치를 비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자료에 의하면, 각 군집된 유적군 가운데 마한관련 유적이 백제 영영화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축조되고 있는 곳이 확인되는데, 그만큼 마한문화의 전통이 강력하게 유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의미는 백제 영역화 이전부터 강력한 세력을 가진 마한의 정치 사회적 집단이 있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그것은 『삼국지』에 보이는 만여가(萬餘家)인 대국으로 비정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대국은 주변 천여가(千餘家)로 구성된 소국 연맹체의 수장국으로서 역할을 담당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마한유적의 분포 밀집도를 바탕으로 분류해보면, 지도에서 보듯이 3개의 군집으로 대별할 수 있는데, Ⅰ군은 금강과 만경강유역을 중심으로 6개의 작은 군집들이 분포하고 있고, Ⅱ군은 동진강과 고창 흥덕을 경계로 하는 공간적 범위에 3개의 소군이 해당하며, Ⅲ군은 고창지역에 3개의 소군집이 배치되어 있다. 이들 각각의 Ⅰ.Ⅱ. Ⅲ군은 마한의 성립이나 성장과정과 백제와 상호관계 설정에 따라서 그 특징을 달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