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문산을 흔히 ‘호남의 영산(靈山)’이라고 한다. 회문산이 품고 있는 종교적 신비스러움 때문이다. 실제 회문산을 성지로 여기는 종단이 여럿이다. 한 때 수십만 명의 신자를 뒀던 갱정유도회의 발상지가 회문산이며, 증산도에서는 ‘지구의 아버지 산’으로 회문산을 신성시 하고 있다. 회문산에 있는 만일사는 이성계의 조선건국과 관련된 설화를 간직한 사찰이다. 회문산 기슭에서 신앙생활을 했던 김대건 신부의 동생과 조카가 묻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종교와 사상은 달라도 민초들의 고단한 삶을 위로하고 새 세상을 열고자 했던 이들의 열망과 숨결을 회문산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갱정유도 발상지
갱정유도는 오늘날 일반에게 이름조차 생소하지만 광복 직후 한때 50만이 넘는 신자를 거느릴 만큼 교세를 떨쳤다. 갱정유도의 발상지가 바로 회문산이다. 순창 구림 출신의 강대성(1898~1954)이 회문산에서 수도하고 성도하고 또 교당을 짓고 포교활동을 했다.
유불선 합일의 신흥종교인 갱정유도가 널리 알려진 계기는 사회를 향해 목소리를 내면서다. 특히 1965년 신도 500여명이 흰 고무신과 갓망건에 두루마기 차림으로 중앙청 앞에서 벌인 시위는 당시 언론의 비아냥거림을 받으며 대서특필됐다. 이들은 미·소를 멀리하고 남북한이 화합할 것과 우리의 미풍양속을 지키고 충효를 바탕으로 세계평화를 주장했다. 당시 당국은 미·소를 멀리하자는 주장을 잘못 해석해 주동자들을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했다. 이에 앞서 강대성 도조는 1954년 혹세무민과 대한민국 전복 혐의로 구속될 당시 심한 구타를 당해 사망했다.
이후 갱정유도 일부 신자들은 정권의 탄압을 피해 지리산 기슭 청학동으로 들어가 자급자족형 공동체를 만들었다. 방송 등을 통해 유명세를 탄 청학동의 김봉근 훈장도 갱정유도 신도로 알려져 있다.
종교연구가 김홍철 전 원광보건대 학장은 “갱정유도를 보고 흔히들 ‘시대에 뒤떨어진 종교’, ‘문병의 배타지대에 사는 사람들’, ‘신비를 좇아 사는 이방인’이라고 하지만, 이들이야말로 진실로 천지만물과 인간을 사랑하며 사람답게 사는 방법을 실천하는 생활 속의 수도인들이요, 혼탁한 사회에 한줄기 맑은 샘물줄기로 생각한다”고 평가했다.( <순창의 문화와 역사> 에 게재한 ‘회문산과 갱정유도’에서) 순창의>
교단의 쇠퇴와 함께 본부조차 남원으로 이전하면서 회문산은 발상지라는 이름만 갖고 있다. 향토사학자 박재순 순창문화원 사무국장은 “어렸을 때만 해도 고유 한복을 입고 상투 튼 이들이 많았으나 지금은 그런 모습을 거의 볼 수 없다”고 했다. 강대성 도조가 수련하고 성도하며 포교했던 회문산 내 승강산에 있었던 초가삼간은 이미 오래 전 없어졌고 그 자리에 발상지임을 알리는 표지석만 세워져 있다. 강대성 도조의 아들인 강을선씨가 쌍치면 용전마을에서 발상지로 가는 길목에 ‘경화궁 서당’을 만들어 훈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강씨가 4~5년 전 작고하면서 이곳도 현재는 폐가로 방치된 상태다. 강대성 도조의 생가(구림면 봉곡리) 역시 터만 남아 있다. 남원 도통동에 있던 도조의 묘소는 몇 년 전 유족들이 생가 인근 선산으로 모셨다.
박재순 국장은 “종단이 활성화 되지는 않았지만 한 종단을 탄생시킨 강대성 도조 묘소에 지난 역사를 기록한 묘비조차 없는 게 아쉽다”고 말했다.
증산도와 회문산
증산교 계열의 종교에서 회문산을 성지로 여긴다. 증산교 창시자인 강일순(호 증산, 1871~1909)이 회문산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하면서다. 강증산은 회문산과 모악산을 부모산이라 하여 이곳을 바탕으로 천지공사(天地公事)가 펼쳐진다고 역설했다. 강증산은“내가 이제 천지의 판을 짜러 회문산에 들어가노라. 천하대세를 오선위기의 기령으로 두 신선은 (바둑)판을 대하고 두 신선은 각기 훈수하고 한 신선은 주인이라”고 했단다. 바둑판의 주인은 한반도, 대국과 훈수를 하는 신선은 주변 4대 강국을 의미한단다. 예부터 명당자리의 하나로 전해오는 오선위기혈을 세계정세로 파악, 한반도가 세계의 중심에 서고 회문산이 대 역사가 펼쳐지는 것으로 증산교는 해석했다.
강증산이 회문산을 찾아 “오선위기 도수를 보러 왔다”는 말은 전하고 있으나 그와 관련된 구체적 장소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증산교 계열 신자들이 회문산을 성지로 보고 순례에 나서고 있으나 특정 장소를 기리는 것 같지는 않다. 다만 회문산 정상 가까운 등산로에 바위에 새겨진 ‘천근월굴(天根月窟)’이 증산도와 관련됐을 것으로 추정하는 이도 있다.
참고로 강증산 제자로 한때 700만명이 넘었다는 보천교 교주였던 차경석은 자신이 거주하던 정읍 입암면 대흥리를 오선위기의 명혈이라고 했단다.
박해시대 천주교 신자들의 피신처
회문산은 박해를 받던 초기 천주교 신도들의 피신처이기도 했다. 박해를 피해 산중에 살았던 교우들이 신앙의 자유를 얻으면서 점차 산 아래로 내려와 회문산 일대 한때 58곳이나 되는 공소가 있었다고 한다. 1884년 작성된 교세통계표에 처음 등장하는‘회문산 공소’ 신자 수는 1883년 35명이며, 1894년에는 81명으로 나와 있다.
현재 정읍시 산내면 종성리쪽 회문산 중턱에 자리 잡은 한국의 첫 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동생과 조카의 묘소가 회문산권 천주교 역사를 대변한다. 동생 김난식 프란치스코(1827~1873)와 7촌 조카 김현채 토마스(1825~1888)는 박해를 피해 현 묘소 아래에 교우촌을 형성하고 살았다. 그 교우촌이 ‘먹구니’였으며, 이는 먹을 만들어 생업으로 삼았던 데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두 분은 교우들과 함께 먹구니에서 1873년까지 화전을 일궈 조로 끼니를 때우며 굶주림을 극복했다. 또 토종벌을 치며 생계를 유지했으며, 구체적으로 벌 50통을 쳤다는 이야기도 구전되고 있다. 두 분이 살았던 먹구니 교우촌은 현재 사람이 살지 않아 무성한 나무들과 풀들로 덮여 있으나 당시 신자들이 살았던 흔적들이 여기저기에 남아 있다.
“박해시대 김대건 신부 집안은 전라도로 많이 내려와 살았어요. 특히 1866년 병인박해 때 논산 금산 고산 익산 부안 정읍 등지로 여러 집안들이 내려왔는데, 김난식 프란치스코와 김현채 토마스가 아무 연고도 없는 회문산에 내려왔을지 추적해봤어요. 박해시대 경계지역이 피난처로 많이 선택됐는데 회문산도 정읍 임실 순창 경계지역이었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이들의 삶에서 드러나듯이 세속으로부터 벗어나 수도자처럼 살기 위해서였다고 봅니다.”
이영춘 호남교회사연구소장(용진성당 신부)은 “김현채를 기억하는 일은 순교자와 순교자적 삶을 함께 기억하는 중요한 자리매김이 될 것이며, 특히 동정부부로 산 삶은 전주 치명자산의 복자 유중철과 이순이 동정부부의 맥을 잇는 일이기도 하다”고 평가했다.
두 분이 작고한 뒤 1899년 먹구니 교우촌에서 조금 떨어진 산내에 능교 공소가 생겼으며, 능교 공소는 지금까지 유지되는 회문산 자락의 가장 오래된 공소다. 천주교는 이를 기려 2007년 교우촌 영성센터를 건립했다.
이 소장은 “천주교 교우촌은 박해시대 형성된 종교인 취락으로서 어느곳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취락형태를 갖고 있어 역사문화적 의미가 크다”며, “이런 취락형태의 현장을 잘 보존한다면 역사문화적, 교육적, 관광문화적으로 훌륭한 가치를 가질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