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완규 교수의 ‘마한이야기’] 익산은 마한의 건마국이었나?

최완규(전북문화재연구원 이사장)

익산 다송리 출토유물.

익산지역이 마한의 고도로 인식되어 왔던 근거는 중국 고대사서 『삼국지』를 비롯해서 우리나라의 『삼국사기』와 『고려사』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고조선 준왕이 바다를 건너 익산으로 와서 마한을 개국했다”고 요약된다. 일반적으로 문헌기록에 보이는 마한 54개 소국 가운데 건마국은 익산의 금마 일원, 감해국 혹은 염로국은 익산 함열 일대, 여래비리국은 익산 여산 일원으로 비정되어 왔다. 그 가운데 ‘건마국’은 마한 연맹체의 맹주로 자리잡고 있었고, 마한 정치체의 성장에 따라서 익산의 건마국에서 충남 직산의 목지국으로, 목지국은 한강유역의 백제에 정복되는 단계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어 왔다.

이병도 박사가 건마국을 마한 후기의 맹주국으로서 익산으로 비정한 이래, 특별한 비판없이 건마국은 익산일 것으로 인식해 왔다고 볼 수 있는데, 그 근거는 현재의 지명인 금마(金馬)와 건마(乾馬)의 음운이 비슷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건마(乾馬)의 음이 “金馬” 혹은 “古馬”의 어느 편에 가깝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 천관우는 『삼국지』의 국명 열거 순서가 북에서 남이라는 방향에 착안하여 감해(感奚)를 익산에 비정하고, 마한 54개국 열거의 마지막 순서에 가까운 건마를 장흥의 백제 때 명칭인 고마미지현(古馬彌知縣)이나 신라 때의 마읍현(馬邑縣)이라는 점에서 장흥 일대를 건마국으로 비정하고 있기도 하다.

이와 같이 건마국을 이른 단계의 마한 소국으로 이해하거나 마한 후기의 맹주국으로 보는 견해에서도 차이를 보이며, 오늘날 익산과 장흥지역은 매우 떨어진 지역으로서 실체적 진실에 접근하기에는 거리감이 없지 않다.

익산 오룡리 토광묘 출토유물(좌)와 익산 오룡리 토광묘 출토 토기류(우).

한편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에 정관(貞觀) 13년(639) 백제 무광왕(武廣王)이 현재의 금마지역인 지모밀지(枳慕蜜地)로 천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마한의 성립과 준왕의 남천지로 비정되는 금마 일대는 백제시대에는 지마마지 혹은 지모밀지에서 금마저(金馬渚)로 그리고 신라시대에는 지모현으로 개칭되었다가 다시 금마군으로 불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중국 상해의 방언에서 支牟와 金馬의 발음이 “jin mou“로 동일하게 발음하고 있음이 확인되는데, 현대의 중국어로도 ”乾“은 ”qian”이나 “gan“으로 발음되고, ”金“은 ”jin”으로 발음되고 있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오늘날 현대어인 금마와 건마가 유사한 음운이라는 사실만을 근거하여 동일 지역을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는 없으므로 금마 일대를 마한 소국 가운데 건마국으로 비정하는 것에 대해서는 신중한 검토가 요망된다.

건마국의 명칭은 3세기 중엽에 쓰여진 『삼국지』에 처음 등장하며, 기록된 소국명은 3세기 중엽경의 양상일 가능성이 크다. 익산이 마한의 고도로 인식되는 시기, 즉 준왕의 남천과 관련된 마한의 성립시기는 문헌자료나 고고학 자료(그림1.2.3)에 의하면 B.C 3세기경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건마국이 등장하는 기원후 3세기 중엽까지 약 600여년 동안 건마국이란 명칭으로 존재하고 있는 셈이 된다. 그런데 지금까지 고고학적 성과로 보면 익산지역에서는 마한의 성립과 관련된 토광묘 축조집단 이후, 특히 3~4세기에는 다른 지역과 뚜렷하게 구분될 정도의 우월적 지위를 갖는 자료가 발견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삼국지』에 마한의 국명으로 등장하는 건마국의 위치 비정에 대한 새로운 검토가 요망되며, 이 뿐 아니라 건마국이 익산이라는 전제로 전개된 마한의 성장과 세력변천에 대한 견해도 재고되어야 할 여지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최완규(전북문화재연구원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