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에 황진이 문학관 건립하자

신정일(문화사학자, 문화재청 문화재위원)

신정일 문화사학자·문화재청 문화재 위원

장수에서 시작된 금강이 충청도를 지나서 익산에 접어들고, 김대건 신부의 자취가 남은 나바우를 지나 성당창에 이르면 미륵사지가 멀지 않다. 온 나라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미륵사지와 왕궁탑 부근, 익산시 왕궁면 미륵산 자락에 대제학을 지낸 소세양(蘇世讓)의 묘소가 있다. 조선의 빼어난 시인인 황진이의 사랑을 이야기할 때 서경덕과 더불어 항상 등장하는 사람이 소세양이다. 그들의 사랑은 너무나 짧았지만 황진이의 시 속에 실명으로 남아 있다. 시문으로 이름이 높았던 그는 중종 4 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직제학을 거쳐 한성부 판윤을 지냈으며 송설체(松雪體)의 명필이자 문장의 대가로 중국까지 이름을 떨쳤다. 조선 후기의 문신 임방이 지은 《수촌만록 水村漫錄》에 소세양과 황진이의 사랑 이야기가 실려 있다 .

소세양은 젊었을 때 마음이 꿋꿋하다고 자랑하며 항상 말하기를 “천하에 여자에게 혹하여 자제하지 못하는 사내는 대장부가 아니다”라고 했다 . 그 무렵 송도 기생 황진이의 재주와 얼굴이 세상에 가장 뛰어났다는 소문을 듣고 친구들에게 약속하기를 “내가 황진이와 30일만 함께 살고서 곧장 떠나와 다시는 털끝만치도 생각하지 않을 것이네. 그러니 만약 하루라도 이 기한을 어기고 더 머무르면 자네들은 나를 사람이 아니라고 하게” 하고 호언장담했다. 그가 송도에 도착하여 황진이를 보자 과연 재색을 겸비한 절세미인이었다. 그들은 30일을 기한으로 애정 생활에 들어갔다. 어느덧 기일이 내일로 닥치자 소세양은 황진이와 더불어 남문루에 올라 이별의 술잔을 나누었다. 황진이는 조금도 슬픈 기색을 보이지 않고서 이렇게 말했다 .

“소첩이 대감께 거문고를 들려드리는 것도 오늘 밤이면 끝인데, 마지막 이별의 곡과 함께 시를 지어서 거문고에 담아 노래로 불러 드리겠습니다.”

그 시가 <소양곡을 보내며 送別蘇陽谷> 라는 시다.

달빛 아래에 오동잎 남김없이 떨어지고 (月下梧桐盡)

서리 속에 들국화는 노랗게 시드네. (霜中野菊黃)

누각은 높아 하늘에 닿고, (樓高天一尺)

오가는 술잔은 취하여도 끝이 없네. (人醉酒千觴)

흐르는 물소리는 차갑기만 하고 (流水和琴冷)

매화 향기는 피리 소리에 어리는구나. (梅花入笛香)

내일 아침 우리 두 사람 이별 하고 나면, (明朝相別後 )

사무치는 정 길고 긴 물결처럼 끝이 없으리. (情與碧波長 )

거문고 가락에 깃들인 그 시구를 들은 소세양은 자기가 너무 비정했음을 뉘우치고서 “아이고, 이제 나는 사람이 아니로구나 ” 하고 그대로 눌러 앉았다.

그때 과연 소세양이 얼마나 더 머물렀다가 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황진이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는 시가 남아 있다 . 황진이는 소세양을 보내고 나서 허전한 마음을 이렇게 읊조렸다.

어져 내 일이야 그릴 줄을 모르던가

있으라 했으면 가랴마는 제 구태여

보내고 그리는 정은 나도 몰라 하노라

이별한 사람을 그리워하는 사랑의 노래다. 가람 이병기는 이 시를 두고 “이 한 수의 시조가 나의 스승 ”이라고 격찬하면서 이 시조가 하도 좋아 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천만 금을 가지고 와도 자기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거절하고, 자기가 선택했던 사람하고만 사랑을 했던 황진이도 가고, 소세양도 세월 속에 사라져갔지만 소세양의 자취가 미륵산 자락에 남아 있다.

나라 안에 수많은 문학관이 있는데, 황진이는 개성에서 살고 개성에 묻혔으니, 문학관을 세울 최적의 입지는 전라북도 익산뿐이다. 소세양이 잠든 왕궁면에 황진이와 소세양의 문학관을 만든다면 나라의 명품 문학관이 되어 온나라 사람들이 찾아오면서 사람들에게 황진이의 문학을 널리 알릴 수 있지 않을까? /신정일(문화사학자, 문화재청 문화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