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 봉수 존재…신호 노선 입증 관건”

문화재청 19일 봉수 조사 성과 발표하는 학술대회 ‘조선시대 통신체계의 완성 봉수’
조선봉수 중심이었지만 전북 ‘가야 봉수’ 언급…장수 가야 봉수 발굴조사 화제 된 탓
문화재청 위원들과 성곽학회 소속 학자들 봉수 실체 규명위해 보완 연구 · 검증 요구

장수 지역에 가야국 봉수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규명하기 위해선 신호전달 체계와 노선을 입증하는 게 관건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학계가 장수에서 발견된 봉수 유적을 놓고 조성시기와 형태 논쟁을 지속하는 가운데 새로운 논제가 제기된 것이다.

문화재청은 지난 19일 대전 KW컨벤션센터에서 ‘조선 시대 통신체계의 완성 봉수’를 주제로 학술대회를 열었다.

조선시대 봉수(부산→서울)를 학술조사한 성과를 발표하는 자리였으나, 최근 장수에서 발견된 봉수 유적 규명 문제도 제기됐다. 발굴조사 당시 학계에서 화제가 됐고, 계속 논쟁이 진행 중인 탓이다.

문제제기는 ‘조선시대 봉수제의 사적 추진 의의 발표’를 맡은 정의도 한국성곽학회장이 시작했다.

우선 정 회장은 “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붉은 기를 휘날리는 배를 발견하면 횃불로서 알리라’는 기록이 있다”며 “이를 토대로 볼 때 삼국시대에 봉화를 사용했던 것으로 볼 여지는 있다”고 설명했다. 관련해서 “최근 전북 장수지역 가야 봉수와 관련한 유적의 발굴조사도 화제가 됐다” 고 덧붙였다.

그러나 정 회장은 “봉수는 정해진 신호에 따라 움직이는 노선이 규명돼야 한다”며 “산의 정상에서 구조물을 쌓고 불을 피운다고 해서 봉수는 아니다”고 했다.

그러면서 “봉수 체계를 설명할 수 있는 구조와 라인이 발견되지 않은 장수 발굴 유적을 가야 봉수라고 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주장했다.

김영관 충북대 사학과 교수는 장수 지역 크기에 비해 봉수가 너무 많은 게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했다.

김 교수는 “조선시대 제2거 직봉(조선시대 전국 봉수망을 연결하는 근본 노선에 위치했던 봉수대)이 동래 다대포~한약 목멱산에 이른다”며 “비교적 먼 거리임에도 봉수가 44개소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전북 동부지역에서 가야가 축조해서 사용했다는 봉화가 100여 곳이 넘는다는 주장이 있다”며 “고대시기와 조선시대 봉수대의 밀도 차이가 크게 나는 것인데 기술 발전의 산물인지 아니면 다른 요인이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고 부연했다.

LH밀양사업단장(문화재청 사적분과 전문위원)은 “봉화 유적에서 가야 토기가 출토됐다고 해서 ‘가야 봉화’라고 하는 데 동의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어 “장수 지역에서 발견된 봉화유적에선 그랭이 축조 공법과 주공, 진안 서비산에선 암반부에 열쇠구멍이 보인다”며 “둘 다 가야국이 축조했다고 하는 데 구조적인 공통점이 없다”고 부연했다.

그러면서 “전북 동부 지역에서 발견된 봉화 유구를 무조건 가야의 것으로 볼 수 없는 이유”라고 강조했다.

차용걸 충북대 역사교육과 명예교수는 봉수 유적 조사·발굴에 관한 제언을 남겼다.

차 교수는 “개별 지역차원에서 너무 섣부르게 접근하면 충분한 고증없이 잘못 복원이 될 우려가 있다”며 “오랜 시간 조사하는 것을 전제로 해서 중앙 단위 행정기관이나 문화재 위원이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