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동물이 1주일에 2~3번꼴로 자주 빠져있어요. 사람을 보면 도망가는데 빠져나가지도 못하고⋯”
23일 오전 김제시 백구면의 한 농수로. 1~2일 전 야생동물이 지나간 흔적이 선명히 보였다. 농수로 내에 쌓여있는 진흙에는 고라니가 지나다닌 것으로 추정되는 발굽이 선명히 찍혀있었다.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농수로는 폭이 상당히 넓었고, 높이는 220㎝였다. 성인 남성이 서도 빠져나갈 수 없는 높이였다.
농수로 내에는 야생동물이 탈출 할 수 있는 그 어떤 장치도 없었다.
주민 A씨는 “고라니가 농수로에 빠져있는 경우를 여러번 봤다”면서 “고라니는 농수로 안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다가 죽는 경우도 허다하다”고 말했다.
농수로에 고라니와 너구리, 멧돼지 등 야생동물이 추락해 고립되거나 폐사하는 사고가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전북야생동물구조센터에 따르면 도내 콘크리트 농수로에 추락해 갇힌 야생동물 구조는 연 평균 100여건에 달한다. 이달 초 익산의 한 농수로에서는 멧돼지 2마리가 농수로에서 죽은 채 발견되기도 했다.
이 같은 야생동물의 농수로 추락‧폐사 이유로는 주로 산과 논 경계지역에 농수로가 만들어져 야생동물이 물과 먹이를 구하러 이동하다 추락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구조대원의 손길이 닿는다면 살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야생동물들은 농수로에 갇혀 죽음을 기다리는 것 말고 방법이 없다.
상황이 이렇지만 도내 농수로에는 야생동물 탈출로는 단 한 곳도 없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지난 2019년 콘크리트 농수로 등 인공구조물로부터 야생생물을 보호하는 내용의 ‘야생동물 보호 및 관리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발의되기도 했다. 법안은 야생동물이 농수로에 빠졌을 경우 빠져나올 수 있도록 계단형이나 경사진 탈출로를 만들도록 명시했다. 하지만 여전히 법안처리는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고, 그나마 농어촌 공사가 최근 농수로에 탈출로를 만들고 있지만 전국 농수로에 설치된 탈출구 비율은 1%에 불과한 실정이다. 수십 년 전에 만들어진 콘크리트 농수로가 시설 보완 없이 그대로 방치돼 있는 것.
야생동물보호단체는 하루빨리 야생동물 탈출로를 모든 농수로에 설치하는 것만이 야생동물을 보호할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전북야생동물구조센터 관계자는 “야생동물구조를 하면서 사람이 오르락 내리락 할 수 있는 사다리를 본적이 있지만 탈출로를 만들어진 곳은 단 한 곳도 본적이 없다”면서 “콘크리트 계단형이나 경사로를 만들어 야생동물이 생명을 잃는 경우를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정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