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황지호 소설가 –신영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주인이 게으른 헌책방일수록 책들은 더 두서없이 쌓여있기 마련인데 이런 헌책방에 으레 괜찮은 책들이 많았다. 이른 봄 두릅나무 순이라도 꺾는 것처럼 면장갑까지 준비해 헌책방을 뒤지다 보면 한 아름 가까이 책을 고르게 되는데. 헌책방의 책들은 긴 시간 정성을 다해 골라도 명저이면서 읽지 않은 책일 가능성이 작았다. 대개 빌려 읽든지 훔쳐 읽든지 읽기는 읽었으나 책장에 꽂혀 있지 않은 책. 그럴만한 책이 아닌데 양장본으로 만들어 책값이 비싸 구매하지 못했던 책. 읽지도 않을 거면서 빌려 간 뒤에 돌려주지 않는 책. 읽지 않을 걸 알면서도 책장에 꽂아 두어야 할 것만 같은 책. 꽂아 두면 왠지 있어 보이는 책. 그리고 절대 헌책방에 있으면 안 되는 책, 헌책방 구석에서 이 사람 저 사람 손을 타고 먼지가 쌓이면서 박대당하면 안 되는 책이게 마련이다.

토요일과 일요일 막노동을 해서 번 돈으로 한 주를 살고, 방학 두 달 일해서 한 학기 등록금을 마련해야 했던 조실부모한 대학생이, 한 아름의 헌책을 모두 구매할 수는 없었고. 돌아갈 버스비와 콩나물국밥값을 제하고 남은 돈만큼만 책을 사게 마련인데. 우선순위에서 밀린 책들은 책방 모퉁이나 눈길이 머물지 않는 뒷줄 정도에 숨겨 다음을 기약하곤 했다. 그 책들을 놓고 오는 마음이 허전하고 스산하여 문득 인생이란 걸 알아버린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는데. 그 초라한 살림살이에도 다음을 기약하지 않고 매번 구매했던, 헌책방에 절대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책이 신영복 선생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었다. 한때 표지에 ‘검열필’이 찍힌 초판만 열 권 남짓 가졌을 때도 있었는데. 더러는 선물로 주고 더러는 빼앗기기도 해서 이제 두 권만 남은, 헌책방에서는 구경조차 할 수 없어 참으로 다행이라 생각하는 책. 이 책을 그 시절 그렇게 생각했던 이유를 그때는 몰랐으나 지금은 알 것도 같다.

한동안 글은 문장이 우선이라고 생각하며 살 때가 있었다. 화려하고 신선한 비유, 조율된 리듬감의 일관성, 익숙한 것을 낯설게 바라보는 시선, 단문과 단문을 연결해 이루어내는 날카로움, 보일 듯 보여주지 않는 행간, 길어도 주술 관계가 깨지지 않는 어순, 문맥에 부합하는 적확한 단어, 조사와 수식어의 적절한 생략과 편안한 음독,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해학과 풍자, 책을 놓지 못하게 만드는 긴장감, 아련함을 남기는 여백 등 문장이 글 쓰는 사람의 최우선 조건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달은 보지 못하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달은 찾지도 않고 손가락의 손톱만 다듬던 때가 있었다. 그 무명(無明)을 벗어나게 해준 책이 신영복 선생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었다. 무엇을 써야 할 것인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의 고민을 시작하게 해준 책. 사회적·문학적 주제, 글은 그 주제가 우선이며 주제 실천 의지와 노력이 먼저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 책. 이 책을 읽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글 쓰는 사람 노릇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황지호 소설가 『2014 우수출판콘텐츠제작지원사업 선정』, 『2021 전북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 당선』 저서 『잠수함 속 토끼』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