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호 정읍시립국악단 단장 전통문화바라보기] 전라북도 노블레스 오블리주

광여도의 태인굴치 일대

노블레스 오블리주란 '명예(Noblesse)만큼 의무(Oblige)를 다해야 한다'는 뜻으로 사회지도층의 도덕적 의무를 뜻한다.

우리나라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경상북도 경주시 교동에 거주한 '경주 최부자댁'이 널리 알려져 있다. 가문의 전통을 살펴보면 권력의 유혹에 빠지지 않게 진사 이상의 벼슬은 금지했으며 만석 이상의 재산은 모으지 말게 했고 찾아오는 과객에게는 후한 대접을 원칙으로 정하고 흉년에는 남의 논밭을 사들이지 못하게 유의시켰다. 또한, 며느리는 3년 동안 무명옷을 입게 했으며 집 안팎으론 100리 안에 굶어서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문중에 주의를 당부했으니 진정 한민족을 대표할만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라 하겠다.

과거 전라북도 정읍 태인에도 경주 최부자의 행적을 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계셨는데 그가 바로 모은慕隱 박잉걸朴仍傑이다. 모은공은 1676년 태인현에 태어나 중추부사를 제수받은 태인의 갑부였다. 그는 불치의 피부병으로 많은 고생을 했는데 노승의 도움으로 비방을 얻고 병이 나아 노승과의 약조였던 '자신보다 타인을 위한 삶'인 신조를 마음에 품고 살았다.

모은 박잉은 한 예로 주민들을 위해 정읍 산내면 매죽리 오가는 길인 굴치라는 곳을 정비하였는데 버선발로 재를 넘어도 흙이 묻지 않을 정도로 납작한 돌을 수없이 놓았다고 한다. 또한, 길가에 초막을 짖고 옷과 짚신을 구비해 누구든지 옷이 얇거나 신이 헤진 사람이 있으면 이곳에서 바꾸어 가라 했으며, 매일 한 말의 밥과 반찬을 지으라 하여 어렵고 허기진 행인의 배를 불렸다. 그 외에도 모은공은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선행을 베풀었는데 특히 정유재란으로 소실된 석탄사를 중건하여 마을의 단합을 꾀했으며 태인 곳곳 덕을 베풀어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일이 많았다고 전한다.

모은공의 많은 선과 덕행은 그렇게 세상에 널리 알려졌으며 조정에서도 그가 사망한 다음 해인 1767년(영조32) 명을 내려 태인군 남촌굴재 중간 큰 암벽에 박잉걸의 초상화와 비문을 새겨 그의 공덕을 치하했다.

또한, 전해오는 특별한 소문 중 하나는 모은공이 사망한 날, 중국 청나라 고종의 황태자가 태어났는데 6개월 동안 왼손을 주먹쥐고 펴지 않아 강제로 펴고 보니 <조선국 태인 박잉걸 환생> 이라 쓰여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전설 같은 이야기는 과거 그의 명성을 가히 짐작할 만한 사실들이라 하겠다.

현재 모은 박잉걸이 정비했던 굴치란 길은 1971년 행정분리 개편되어 순창군으로 편입되어 있다. 그 옛날 정읍 태인지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과 함께 순창의 맥으로 이어진 이 고개는 이제 다른 많은 길이 생기고 인적이 끊겨 다시 험한 길이 되었지만, 역사를 품고 지켜온 전라북도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체이자 근간으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