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출간되자마자 한국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던진 책이 있다. 이어령 교수의 에세이집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다. 한국적 정서의 심층을 탐구해온 이 교수가 한국인과 한국문화의 정체성을 정리해낸 이 책은 출간과 함께 베스트셀러이자 필독 도서가 됐다. 개정판이 나오기 전 40여 년 동안 250여만 부가 팔려나갈 정도로 최장기 스테디셀러 자리까지 지켰으니 독자층의 폭을 짐작할만 하다.
이어령 교수(1934~2022)를 인터뷰로 만난 것은 12년 전이다. 2010 유네스코 세계문화예술교육대회 조직위원장을 맡았던 이 교수는 대회 전반을 운영하며 개막식 행사의 모든 것까지를 진두지휘했던 터라 많이 지쳐있었다. 그러나 인터뷰 내내 문화의 창조성과 그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노교수의 열정은 차고 넘쳤다.
그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예술교육대회 개막식은 세계적으로도 특별한 관심을 모았다. 그 바탕은 이 교수가 이름 붙인 ‘디지로그’의 힘에 있었다. 우리나라 고유의 전통과 4D 기술이 접목된 세계 최초의 ‘디지로그 아트공연’. 선진국 회원들에게는 감동을, 첨단기술에 낯선 나라 회원들에게는 충격을 전한 개막식은 문화의 힘을 제대로 보여준 무대로 호평받았다. 대회가 열린 서울 코엑스 본회의장에 내걸린 2천 10장의 면 티셔츠 또한 화제였다. 익숙한 배너 물결을 티셔츠 물결로 대체한 자리. 이 교수는 스스로 명명한 이 ‘티셔츠 네트워크’를 아날로그의 새로운 반역이자 반동의 표현이라고 소개했는데 이 또한 그의 빛나는 창조력이 이어낸 소산이었다.
한국의 도시에 큰 관심을 두고 있었던 이 교수는 그날 인터뷰에서 전북의 도시들을 창조도시로 가는 가장 가능성 있는 도시로 꼽았다. “지금의 도시는 19세기나 일제 식민지 때 만들어진 것들인데도 우리는 다시 똑같은 도시를 만들어내려고 애쓴다”며 꺼냈던 이야기다.
그가 전북의 도시들에 건넨 조언이 있다.
‘그동안 소외당했던 것, 고통받았던 것들이 창조의 원동력이 되게 하라’는 것이었다. 그의 주문은 사실 새롭지 않았으나 ‘우리만 가진 것에 자꾸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조언은 지역이 가진 가치를 새삼 일깨워주었다.
새만금에 대한 조언도 있다. 그는 새만금을 산업주의의 찌꺼기 같은 것들을 가져다 놓지 말고 가장 독창적인 21세기 개념의 도시로 만들라고 조언했다. 그가 말하는 21세기 신개념의 도시는 생명자본주의 도시다. 역시 창조성의 발상이다.
‘시대의 지성’으로 불리며 늘 시대를 앞서갔던 이어령 교수가 지난 2월 26일 영면했다. 여든여덟 해, 그의 지적 탐험과 깊은 통찰의 시간은 멈추었으나 더 융성해질 지혜와 탐색의 숲이 그의 빛나는 창조력과 함께 우리에게 남았다.
/김은정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