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교 75돌 전북대학교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특별전 ‘비 위드 유(Be With You), 전북대학교’를 보러 가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그러나 내 마음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이 답답하고, 무겁고, 힘들게 느껴지기만 했다. 전북대 75년 찬란한 역사의 중심부에 ‘고 이세종 열사’의 처절한 죽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별전이 열리는 박물관 전시장에 들어가 ‘고 이세종 열사’ 유품관 앞에서 피로 물들어 잿빛이 되어버린 청색 웃옷과 학생증, 빛바랜 사망확인서를 보는 순간, 그날의 크나큰 상처가 다시 선명한 뉴스가 되어 내 머릿속을 지나갔다.
1980년 5월 18일 오전 0시경, 전북대 학우들이 농성하던 그 시각에 나도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다. 당시 나는 전북대 수학과 2학년에 재학중이었다.
학생회관 2층 교수회의실(현 방송국)안, 계엄군이 곧 쳐들어온다는 긴박한 이야기에 술렁였다. 모두 농성장을 떠나야 할지, 그대로 지켜야 할 것인지 열띤 토론이 있었다. 함께 지키자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농성장 분위기를 바꿀 겸 각자의 주머니에서 십시일반 동전들을 모아 술을 사러 한 선배가 농성장을 나가는 사이, 나는 창문을 통해 정문(현 구정문)쪽에서 비추는 장갑차들의 불빛을 보았다.
그 불빛들이 순식간에 폭군이 되어 농성장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어 버릴 줄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당시 ‘비상계엄철폐’와 ‘전두환 퇴진’을 외치는 대학생들에게 총칼을 들이밀 줄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학생회관 계단을 통해 군홧발 소리가 쿵쾅거리며 들려오고, 착검을 한 계엄군들에 의해 농성장에 있던 40여명의 학우들이 심한 구타와 함께 포승줄에 묶였다. 모두 운동장으로 연행되는 사이, 누군가가 죽었다는 이야기가 귓속말을 통해 전해졌다.
훗날 술 사러 농성장을 막 나갔던 선배의 말에 의하면, 본인이 나가자마자 계엄군들이 들이닥쳤고, 학생회관 뒤쪽 풀밭에 엎드려 농성장에서 들려오는 엄청난 구타소리와 비명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그 처절한 비명소리를 떠올리며 농성장의 학우들과 고통을 함께하지 못함에 엄청 괴로웠다고 이야기했다.
그날 밤 목숨을 잃은 학우가 ‘이세종’이었다는 것을 경찰서 유치장 안에서 들었다. 당시 경찰은 고 이세종 열사의 죽음을 ‘추락사’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2층 농성장에 있었던 우리들은 어느 누구도 단순한 추락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주검을 검안했던 이동근 전북대병원 교수는 훗날 “두개골 골절과 간장 파열은 추락이라는 한가지 원인에 의해 동시에 발생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날의 사건은 어느 누구도 입 밖으로 내놓고 싶지 않은, 치유되지 않는 각자의 깊은 상처로 남아있다.
이세종 열사는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전국 최초의 희생자였다. 그러나 이 역사적 사실과 광주의 참혹한 현장의 축소판이 바로 전북대에서 앞서 벌어졌다는 이야기는 아직도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진상 규명은 물론 역사적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40여년이 지난 지금, 전북대가 특별전을 통해 고 이세종 열사의 유품을 전시하는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대한민국 민주화운동의 역사에 큰 획을 그은 1980년 5월 18일 전북대 학생들의 농성과 이세종 열사의 희생에 대한 진실이 제대로 밝혀지길 희망한다. 그리고 역사적 재평가를 받을 수 있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조혜경 전북대 민주동문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