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부모님은 식민지 시대, 가난 때문에 고향을 떠나 일본으로 건너간 재일교포 1세였다.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했던 부모님은 하루 벌이 노동으로 5남매를 키웠다. 화가가 되고 싶었던 아들은 꿈을 포기해야 했다.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지만 ‘어떻게든 고등학교는 가르치겠다’는 어머니의 의지로 공업고등학교에 들어갔다. 전기회사에 취직했으나 한국인에 대한 차별이 심한데다 적성도 맞지 않아 그만두고 하루 벌어 사는 노동을 택했다.
우연히 인수한 가전제품 가게가 그를 살렸다. 1964년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시작된 가전제품 바람 덕분이었다. 돈을 벌자 그는 경제적 어려움으로 꿈을 포기한 동포들을 돕기로 했다. 재일교포 화가들이 첫 번째 대상이었다. 작가들을 지원하고 작품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피카소 샤갈 뭉크 앤디 워홀 달리 등 20세기 거장들의 작품부터 이우환 손아유 등 세계 화단에서 주목받는 한국인 작가들의 작품까지 1만여 점이 그의 품에 안겼다. 수십 년 동안 자신이 수집한 작품을 한국의 미술관에 기증해온 하정웅 광주시립미술관 명예관장 이야기다.
초등학교 시절, 그의 어머니는 명절이면 그에게 특별한 일을 시켰다. 마을 뒤편 절에 있는 작은 봉분에 음식을 놓고 절을 올리게 하는 일이었다. 그 무덤이 아키타에 끌려왔다 죽은 이름 없는 한국인 노동자들의 것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됐다.
그가 살았던 아키타는 강제 연행으로 끌려온 조선인 노동자들이 많았다. 일본에서 가장 깊은 다자와코 호수에 댐을 만들고 수력발전소를 건설하는 현장에 차출된 노동자들이었다. 힘든 노동과 추위에 시달리다 도망치거나 영양실조로 죽은 노동자들이 적지 않았다. 이름도 없이 강제로 끌려와 타국에서 생을 마감한 노동자들의 생애가 안타까웠던 그는 다자와코 호수 옆에 그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기도의 미술관을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미술관을 짓기 위해 땅을 사고 설계까지 마쳤지만 한일관계가 악화되면서 계획은 무산됐다.
일본 문부과학성이 일제강점기 조선인 노동자를 ‘강제연행’했다는 표현이 사라진 고등학교 검정교과서를 통과시켰다. ‘강제 징용’과 ‘강제 연행’이 ‘징용’이나 ‘연행’으로 수정되고, ‘일본군 위안부’ 등의 표현도 사실상 사용을 금지해 삭제된 교과서들이다. 반면 12종의 사회 과목 교과서는 독도가 ‘일본 고유 영토’라거나 ‘한국이 불법 점거’하고 있다는 주장을 강화했다. 일본이 수많은 노동자를 강제로 끌고 갔다는 사실을 숨기거나 지우기 위한 시도다.
일본의 노골적인 역사 왜곡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교과서를 통한 역사 왜곡 또한 줄곧 자행되어왔으니 한일관계의 대치적 국면이 깊어질 수밖에 없다. 더 적극적이고 단호한 의지가 필요해졌다. /김은정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