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창순 명창의 부채

유영대 국악방송 사장 

여름이 오면 성창순 명창이 생각난다. 아주 무더웠던 그해 여름에 선생을 만났다.  선생은 자신이 그동안 여러 형태로 출반했던 모든 음반자료를 책보에 싸서 내게 건네주셨다. 오래된 음반, 카셋트 테이프, CD 음반까지 망라한 것이었다. 당신의 예술세계를 하나로 묶어서 종합음반으로 정리하시고 싶다고 했다. 그때 선생은 내게 우전(雨田) 신호열 선생의 ‘적벽부’ 글씨가 담긴 부채를 선물해 주셨다. 

선생이 내게 주신 부채는 우전 선생의 글씨로 소동파의 ‘적벽부’가 촘촘하게 채워져 있었다. 우전이 세필로 단아하게 써서 직접 성창순 명창에게 준 것이다. 우전 선생은 빼어난 한학자이자 섬세한 글씨를 잘 쓴 분으로 이름이 나있다. 나도 대학 다닐 때, 이분에게 <고문진보>와 <시경>을 배운 바 있는데, 선생의 가르침에 수업 때마다 감탄했었다. 선생은 토를 달지 않고 한문을 읽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선생은 네 글자씩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낭송하셨다. 지금도 부채를 펼치면 스승이신 우전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참 경이롭다.

성창순 명창은 은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는 소리를 가졌다. 세상의 모든 이야기를 소리로 그려냈다. 명창이 소리할 때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소품은 부채다. 성창순 명창에게는 탐낼만한 부채가 많았는데, 이당(以堂) 김은호 선생의 장미그림 부채가 기억에 남는다. 성창순 명창은 소리판에서 늘상 장미 그림 부채를 들고 판을 이끌어갔다. 이 그림은 원래 이당이 김소희 명창에게 선물한 것이었다고 한다. 김소희 명창은 이 부채를 두고두고 아꼈는데, 어느날 성창순 선생을 불러 부채를 물려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끼던 놈인디 결국 자네에게 주네. 잘 간직허고 좋은 소리허시게”. 

성창순 명창은 귀한 <춘향가> 소리판에서만 장미그림 부채를 들었다. 부채를 강하게 펼치면, 붉은 장미에서 내뿜는 진한 장미향이 순식간에 주변에 퍼졌다. 김은호 화백은 20세기 전반기부터 활약한 당대 최고의 화백으로 화조도와 인물 그림에 능한 분이었다. 남원 광한루의 춘향사당에 모셔진 춘향 영정이나, 진주의 촉석루에 모셔진 논개의 초상도 이당의 단아한 화풍의 산물이다. 이당은 우리 음악을 애호하였고, 우리 음악에 대한 조예도 대단히 깊어 인연이 닿은 예술가들에게는 멋진 그림을 선사했다고 전한다. 

성창순 명창이 <심청가>를 할 때면 소정(小亭) 변관식 선생의 복숭아꽃밭 그림 부채를 꺼내들었다. 심청이가 살던 곳은 도화동이고, 장승상 부인이 살던 곳은 무릉촌이다. 소정 선생은 바로 그 도화동 무릉촌을 고스란히 그림으로 그려, 성창순 선생에게 증정했다. 소정은 산수화에 특히 빼어난 분이다. 그이의 복숭아 그림은 도원을 지향하는 도가적 세계와, 복숭아밭이 가진 관능적 아름다움을 동시에 보여준다. 소정의 산수화 부채는 명창이 펼쳐만 보아도 시원한 바람이 일어났다. 

부채에는 소리꾼의 교양이 담겨 있다. 성창순 명창은 우전 선생에게 서예를 배워 단아한 글씨를 남기기도 했다. 선생은 특히 우아하고 기품있는 자세로 소리판에 임했다. 선생은 부채를 펼쳐 보이는 자태마저도 우아했다. 선생이 직접 소리하는 장면은 이제 다시 만나기 어렵다. 하지만 선생이 남겨준 부채와, 책보에 싸서 내게 건네준 음원자료는 내게 남아있다. 음원으로 만들어 선생께 전해드리지 못한 것이 여전히 내게는 부채다. 그렇지만 이제 선생이 남기는 음원자료를 모두 정리했다. 이 소중한 음원을 국악방송 아카이브에 담아두고, 선생의 예술세계 전모를 세상에 전하고자 한다. 

/유영대 국악방송 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