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사 회랑(回廊)은 바다로 이어져 있고

김병기 전북대 명예교수

도솔암이 장엄하단 말 옛날부터 들었는데/ 봉래산의 조용한 모습 이제야 보네/ 천 걸음 되는 회랑은 물 불어난 바다로 이어져있고/ 백 층 누각은 물위에 뜬 뭇 봉우리를 감싸고 있네/ 세상을 잊은 해오라기는 종소리 속에서 잠들었고/ 불법을 듣던 용은 탑 그림자 사이에 서려 있네/ 난간마루에 걸터앉아 있자니 해질 녘 어부들의 노래 소리 들리고/ 물결은 비로 쓴 듯이 잔잔하며 달은 활처럼 굽은 모양으로 떠오르네.(舊聞兜率莊嚴勝, 今見蓬萊氣像閑. 千步回廊延漲海, 百層飛閣擁浮山. 忘機鷺宿鍾聲裏, 聽法龍蟠塔影間. 雄跨軒前漁唱晩, 練波如掃月如彎.)

고려 말 문호였던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1287~1367)선생이 김제의 「금산사」를 제목으로 삼아 쓴 시이다. 시 안에 놀랄 만한 구절이 있다. “천 걸음이나 되는 회랑은 물 불어난 바다로 이어져있고”라는 구절과 “난간마루에 앉아 있자니 해질 녘 어부들의 노래 소리 들리며”, “비단 물결은 비로 쓸어 놓은 듯 잔잔하다”라는 구절이다. 김제 금산사의 회랑이 바다로 이어져 있고, 금산사 난간마루에 앉아서 어부들의 노래 소리를 들으며, 발아래로 바다 물결을 바라보고 있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금산사는 고려시대에도 지금과 같은 자리에 있었다고 하니 이 시를 통해 고려 말까지만 해도 금산사 코앞에 바다가 펼쳐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포은(浦隱) 정몽주(鄭夢周1337~1392) 선생도 금산사 앞이 바다였다는 사실을 확인해주는 시를 남겼다. 푸른 물결 사이로 금산사의 모습이 완연하네/ 산 아래 조각배에 몸을 맡겨 이곳으로 돌아왔더니/ 눈 아래로 금산사의 참모습이 다 펼쳐 있으니 /다리 힘들여 더 올라야 할 게 뭐있으랴.(金山宛在碧波間, 山下扁舟信往還. 眼底已窮眞面目, 不須脚力更登攀.) 이 시는 배를 타고 바다로 나왔더니 금산사의 전체 모습이 한 눈에 보인다고 읊고 있다. 역시 금산사 앞이 바다였음을 말해 주고 있다. 

최근 연구자들 사이에 김제 벽골제(碧骨堤)를 두고 ‘인공으로 판 저수지 둑’이라는 주장과 ‘바닷물을 막은 방조제’라는 주장이 나뉘고 있다고 한다. 앞서 살펴본 이제현, 정몽주 두 선현의 시를 통해 고려 말의 상황을 유추해 본다면 벽골제는 인공 저수지 둑이 아니라 바닷물을 막은 방조제일 가능성이 많다. 금산사 코앞까지 바다라고 했으니 말이다. 

부안군 주산면은 한자로 ‘舟山(주산)’이라고 쓴다. ‘배를 대었던 산’이라는 추론이 가능한 이름이다. ‘배매산’이라는 산도 있으니 ‘배를 매어 둔 산’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지금은 평야인 주산면이 옛날에는 배가 드나드는 해안이었던 것이다.  

이제현, 정몽주 두 선현의 시를 통해서 우리는 고려말기만 해도 주산면으로부터 김제 원평 들을 지나 금산사에 이르는 지역이 바다로 이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전국에 금산사라는 이름의 절이 여럿 있다. 그 중에는 인천과 부산 등 바다와 인접한 지역에 자리한 금산사도 있다. 그러나 이들 금산사는 최근에 세워진 신흥사찰이다. 이제현, 정몽주 두 선현이 시로 읊은 금산사는 당연히 김제의 금산사이다. 

선현이 남긴 한시 두 수가 김제 벽골제의 성격을 규명하는 데에 적지 않은 도움을 줄 수 있게 되었다. 우리와 한자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한글전용’정책에 대한 재검토와 한자교육 강화를 추진해야 할 때이다.  

/김병기 전북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