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깊이 나직나직 눈이 오시네
지금까지 있었던 일 다 헛것이라며
세상 떠돌던 이야기는 전설로 변하며
밤이 깜깜함 털어내어
눈이 오시네
세상 소리는 듣는 게 아니라
보는 것이라며
모든 만물은 하나로 보라며
가물거리던 기억은 덮으며
눈이 새 판으로 오시네
하늘이 처음으로 세상에
하늘 빛깔로 내려서며
사람들은 감동하라고
이쯤으로 정갈하게 종교 하나 펼치라고
사복사복 눈이 오시네
△‘눈이 오시네’는 마치 냉커피를 마실 때처럼 더위를 가시게 한다. 긴 장마와 된더위에 부대끼는 가난한 독거노인 안방에도 ‘나직나직’ 눈이 오시어 외로움을 덮어주었으면 좋겠다. 유랑하는 낮은 영혼에 반짝반짝 하얗게 빛을 내는 눈이었으면 좋겠다. 그리움과 쓸쓸함을 위로해 줄 ‘눈’은 분명 ‘사람들은 감동하라고’ ‘사복사복’ 지붕을 덮을 것이다. 폭염이 눈으로 변신할 때 여름과 겨울을 기억하는 감정이 저장될 것이다. /이소애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