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힌 언어, 열린 언어

박종률 우석대 교수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제대로 된 사과도 아니고 심심한 사과라고?, 난 하나도 안 심심해! 최근 여론의 관심을 끈 ‘심심한 사과’의 온라인 공지글과 댓글 일부다. 언론에서는 젊은 층의 문해력(文解力)을 꼬집었다. 무거운 탄식까지 곁들였다. 세대 간의 언어 차이를 비교하기도 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교육부는 초·중·고교 학생들의 문해력 교육 강화 내용을 담은 교육과정 시안을 공개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젊은 누리꾼들의 가벼운 재기발랄일 수 있다. 쉬운 우리말을 놔두고 왜 어려운 한자어를 쓰느냐는 지적이다. “정말로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라고 표현했다면 ‘심심한’ 논란은 없었을 것이다.

 

우리말은 고유어, 한자어, 외래어 등을 포함하고 있다. 상대가 이해할 수 있도록 상황과 맥락에 따른 어휘 선택이 중요한 이유다. ‘마음의 정도가 깊고 간절한’ 심심(甚深) 말고도 ‘지루하고 따분하거나 음식 맛이 싱거운’ 심심도 있기 때문이다. ‘다른 말은 그만두고 요점만 말하자면’의 도대체(都大體), ‘이렇게 하든지 저렇게 하든지’의 어차피(於此彼)는 모두 순우리말 같은 한자어다. 그런가 하면 ‘성질이 곧아서 융통성이 없는’ 뜻의 고지식하다는 한자어 같은 순우리말이다. 세종대왕은 백성들이 쉽고 편안하게 사용하도록 한글을 만들었다. 그런데 쉬운 우리말과 외래 언어들이 뒤섞이면서 우리말이 어려워졌다. 따라서 쉬운 우리말을 어려운 말로 만들지 않도록 먼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언어 사용에 따른 오해와 불통(不通)을 두고 남을 탓할 일이 아닌 것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 정치권에도 잊지 못할 ‘사과(謝過)’ 사건이 있다. 2004년 당시 국회가 파행(跛行) 사태를 겪었다. 이해찬 국무총리의 거친 발언 때문이었다. 총리의 사과가 여야의 타협안이었다. 하지만 총리는 ‘사과’ 대신 ‘사의’를 표명했다.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감사하다는 사의(謝意)도, 물러난다는 사의(辭意)도 아니고 대체 무슨 사의? 국어사전을 보면 사의(謝意)에는 잘못을 빈다는 뜻도 들어있다. 결국 총리에게는 자존심이 중요했던 모양이다. 사과를 대체하는 어휘를 어렵게 찾아내는 데는 성공했는지 몰라도 그의 진정성은 의심을 받았다.

 

유력 인사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일탈 행위에 따른 ‘사과’ 표현에 인색하다. 외교적 관례로 사용되는 ‘유감(遺憾)’이 언제부터인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섭섭함·아쉬움·불만스러움을 의미하는 ‘남길 유(遺)·섭섭할 감(憾)’의 유감이 격조 있는(?) 사과의 표현으로 둔갑했다. 잘못을 솔직히 반성하고 진정한 용서를 구한다면서 “유감의 말씀을 드립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이다. 그들의 유감 표명에 국민이 오히려 유감을 느끼게 되는 꼴이다. 어려운 말은 자신을 뽐내거나 허물을 덮으려는 닫힌 언어다. 쉬운 말은 상대를 존중하고 자신을 낮추는 열린 언어다. 깊이 생각한다는 말을 굳이 ‘사료(思料)’로 표현했다가 강아지 사료(飼料)가 될 수도 있는 노릇이다.

 

‘심심한 사과’ 논란 이후 문해력이 여론의 관심을 받고 있다. 그러나 ‘글을 읽고 쓰는’ 문해력은 ‘말하고 듣는’ 언어 소통법과 함께 교육돼야 한다. 이해하기 어려운 신조어, 외래어, 한자어들이 넘쳐나는 시대다. 말하고 쓰는 사람은 항상 듣고 읽는 사람을 배려해야 한다.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무릎을 굽히는 소통의 언어가 필요한 때다. 말과 글로 사는 언론인들이 먼저 모범을 보여야 한다. 

 

/박종률 우석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 전 한국기자협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