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가 치자 빛으로 물들어 간다. 들녘의 메밀꽃은 하얗게 솜사탕을 풀어내고 소슬한 바람이 차창 가로 스친다. 긴 세월 얽매인 직장의 매듭이 풀리자마자 남편은 부모님을 모시고 여행을 떠나자고 했다. 그 말에 “이왕이면 홀로 계신 시이모님 두 분도 같이 모시고 가요.” 하는 내 말에 그 사람은 “어머니가 더 좋아하겠네.” 하며 소년처럼 들떠서 완도 여행길에 올랐다.
나이 들어 거동이 자유롭지 못한 시어머니는 이모들과 전화만 할 뿐 만나지 못해 답답하다고 넌지시 푸념을 했다. 폐를 갉아먹는 병마에 지쳐 바람 불면 날아갈 듯한 가랑잎 같은 시어머니. 잠시나마 파리한 그 얼굴에 웃음 띠게 할 수 있다면 맘의 부담쯤이야…. 앞에 앉은 세 여인은 소풍이라도 나온 듯 끝없이 말 꾸러미를 풀어낸다.
시간이 세 자매의 고운 모습은 가져갔으나 기억 속에선 지나간 일을 그림처럼 그려낸다. 어린 시절 친정집 옛 얘기로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비 내리는 날 익산 미륵사지 근처 저수지에 가면, 물고기들이 새 물 내를 맡고 상류인 도내 골 냇가로 거슬러 온단다. 몰려오는 고기들을 대나무로 엮은 용수를 물속에 넣고 건져 올리면 바가지로 퍼 담을 정도로 많이 잡혔다.
보리새우, 쏘가리, 붕어 등이 가득 담긴 양동이를 들고 그네들은 신바람이 나서 집으로 갔다. 어느 보름날 밤에는 친구들과 귀신 잡기 놀이를 하다가 동네 어귀 느티나무 아래 당집 근처에 갔는데, 하얀 수염에 흰옷을 입은 장대처럼 큰 남자가 지팡이를 들고 나타났다. 호들갑스러운 여자애들은 귀신이 정말 나타났다고 혼비백산하여 친구 집으로 몰려가는 소동을 벌였다. 아마도 당집 무속인이 아니었나 싶다. 그때를 떠올리면 그네들은 지금도 모골이 송연해진단다. 세 자매는 번갈아 가며 세월의 그물에서 추억을 건져 올렸다.
완도 수목원에 도착하여 호숫가를 걸었다. 큰이모는 지팡이에 의지하여 걷고 작은이모는 관절염으로 오리걸음으로 쩔뚝이며 다녔다. 시어머니는 제일 허약하지만 그나마 걸음은 비틀거리지 않았다. 기우뚱한 그들의 뒤에 걸린 그림자도 시름에 겨운 생의 무게인 듯 절룩이며 따라갔다. 육신은 서걱거려도 마음만은 소녀라 얼굴에 동심이 흘렀다. 해 질 녘에 전망대에 오르니 다도해가 한 눈에 들어왔다. 크고 작은 섬들이 어우러져 수려했다. 서산 너머로 해가 숨어들고 있다. 세 자매의 백발 위로 노을이 내려앉아 붉게 물들어 간다.
남남으로 만나 시어머니와 인연을 맺은 지 어언 삼십여 년. 색색의 사연이 층층으로 쌓여 무지개가 뜨기도 하고 먹구름이 몰려올 때도 있었다. 이제 세월의 더께만큼 마음자리도 헐렁해져 야위어 가는 어머니를 감싸 안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여행을 좋아하는 시어머니와 완도에 오는 길에 이모님도 겸사 모시고 왔는데……. 머지않아 누구나 기우뚱거리며 걸어가야 할 그 길 위에서 손잡아 줄 사람 있다면 외로움에 휘청거리지 않으련만.
해수탕의 열기로 얼굴에 복사꽃을 피운 세 여인과 땅끝 마을을 찾았다. 땅끝 표지석 앞에서 그녀들은 사진을 찍었다. 흰머리 날리며 배시시 천진하게 웃는 세 자매. 언제 다시 손잡고 여행할까. 그네들의 얼굴에 서글픈 빛이 언 듯 스쳐 간다.
흘러가는 세월은 그네들의 젊음을 데리고 갔다. 지금 이 순간도 시간이라는 지우개는 우리의 기억을 지워가고 있으리라. 하지만 그네들에게 특별한 순간은 잊을 수 없는 카이로스*가 되어 문득문득 생각날 것이다. 웃음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이번 여행이 우울할 때, 세 자매에게 한 모금 청량제가 되었으면.
박일천은 수필 전문지 ‘에세이스트’로 등단하여 <토지문학 수필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한국문협 회원, 샘문학회장으로 활동했으며 수필집 <바다에 물든 태양> , <달궁에 빠지다> 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