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이 있는 교실

한긍수 전북도교육청 정책공보관

신학기 때 대학 강의실에서 가장 답답했던게 학생들 질문이 없는 거였다. 말이 되는가? 교실에 질문이 없다니. 

왜 질문을 하지 않을까? 대략 세 가지 원인이 작동하지 싶다.

첫째,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다.

고교시절 토의, 토론을 즐기는 친구들 모임이 있었다. 대부분의 친구들과 나는 다투어 말을 하는 쪽이고, 친구 A는 주로 듣는 쪽인데 가끔 질문을 했다.

"그게 뭐야? 그건 왜?"

우린 그 질문을 무시하면서 살짝 넘어가곤 했는데, 사실 A의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바늘에 콕 찔린 기분이었다. 친구의 질문을 받고서야 나는 내가 잘 모른다는걸 알게 되었다. 모르는 걸 난 왜 아는 척 넘어갔을까, 질문하지 않았을까?

친구의 어떤 질문은 내 가슴에 새겨져 오랜 세월 되새기곤 했다. 난 A를 친구이자 스승으로 여겼다. 다른 친구들도 나와 비슷한 심정이었나 보다. 친구들이 A를 말할 때 수식어가 붙기 시작했는데 '존경하는 친구'라는 것이었다. 말 잘하는, 많이 아는 친구가 아니라 질문하는 친구가 존경을 받았다.

아, 일찍이 공자 선생이 말했다.

"아는 것을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 하는 것이 아는 것이다."

질문을 가로막는 둘째 원인!

자신의 질문이 시시해서 비웃음을 살까봐...

그렇다. 시시한 질문, 피상적인 질문이 있고, 깊이있는, 지혜로운, 깨달음을 주는 질문이 있다. 좋은 질문은 아무나 하지 못한다. 운동선수가 훈련을 통해 근육을 기르고 기술을 연마하듯 좋은 질문을 하려면 질문하는 근육을 길러야 한다. 깊이 있는 질문은 시시한 질문으로부터 시작된다. 자기를 드러내는 용기를 내야 한다. 

시시하게 시작할지라도 질문하는 사람은 빨리 성장한다. 질문이 없으면 성장도 더디다. 내가 아는 한 시, 소설, 음악, 방송 모든 분야에서 고수가 된 사람은 모두 '질문하는 사람'이었다.

제일 나쁜 장애물은 질문을 싫어하는 분위기다. 질문을 '진도를 방해하는 장애물'로 여기거나 심지어 '무례한 도발'로 여기는 풍토가 있다. 질문을 억압하던 군사독재 시대의 유물이 21세기에도 살아 꿈틀거리는 것이다. 

위대한 스승 공자는 ‘질문하는 사람’이었다. 공자가 늘 묘당에 들어가 질문을 하자 그를 시기하는 사람들이 말했다. “누가 공자보고 예를 안다고 했나? 매사에 묻기만 하는데.” 공자가 말한다. 

“그렇게 '묻는' 것이 예(禮)이다.”

소크라테스는 질문을 통해 정확한 앎에 도달하도록 도왔다.

질문은 학생만이 아니라 교사가 해야 한다. 질문이 학생을 앎에 이르게 한다. 

천재 물리학자 리차드 파인만은 말한다. 

“질문이 없는 '답'을 갖기보다 차라리 답이 없는 '질문'을 갖고 싶다.”

교실에서 교사의 정체성은 '질문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새학기, 질문이 풍성한 교실이 되면 좋겠다.

질문이 있는 교실, 교사가 이끌어야 한다.

/한긍수 전북도교육청 정책공보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