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물같이 구름같이 바람같이 흘러가는 게 세월이라 했던가? 흔히 말하는 초로(草露)인생의 우리들, 노년의 삶에서 강산은 또 몇 번이나 변하며 무심하게 흘러갔는가? 그 누가 '젊은이는 꿈을 먹고 살고 노인은 추억을 먹고 산다'고 했던가? 나는 말을 저주하고 싶다.
인생이란 지금까지 참으로 정신없이 달려온 인생 여정이 아니었던가? 그 한많은 세월 속에서 연인을 만나 사랑을 했고, 결혼도 하고, 가정을 이루어 아이들을 낳았을 때는 하늘을 얻은 기분이었지. 은근과 끈기로 물 불 안 가리고 열심히 맡은 소임을 다하려 이를 악물고 따뜻한 보급자리 내 집을 마련했다.
밤잠을 설친 기억이며 온몸을 희생하여 가르친 자식이 대학을 졸업할 때는 내 못 배운 서러움을 풀듯 대리만족했던 날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었다.
오늘날 세계 7위의 경제 대국을 이룬 이 나라의 산업 전사는 누구인가를 묻는다면 우리 노년들의 보릿고개 삶이었다고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는 우리들의 인생이 아니었던가? 어디 그뿐이랴? 하늘을 찌를 듯한 불같은 성질도, 내 온몸을 감싸고 나를 지탱하던 자존심마저도 버리고 오로지 한 길만 보고 정진했던 우리들의 인생이었지.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적당히 마음 다스리려 포용하는 생활도 배웠고, 그리하여 강물처럼 유유하게 흘러가는 삶을 경영했던 우리가 아닌가? 시방 생각해 보니 우리는 참으로 아름다운 인생을 경영했다는 자부심이 넘친다. 요즈음은 자녀들 다 출가시키고 우리들만의 인생을 찾으려 하니, 눈은 돋보기를 써야 글자가 보이고, 점점 희미해져 가는 소리, 몸 마디마다 불편한 관절염이며 온통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 되어 약을 한주먹씩 먹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내 부모가 걸었던 길들을 우리도 답습하지만 그렇게 살아온 그 길이 추억이라기보다는 처절한 삶의 소용돌이였다는 생각이 더 지배적이다. 가끔 저 임금의 노인 일자리를 찾아 젊었을 때 하던 것처럼 새벽밥 먹고 출근하여 얼마나 벌겠다고 땅거미가 져야 귀가하는 별 보기 운동을 하면서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기쁨이고, 자식들에게 손 안 벌리고 사는 내 삶을 살 수 있음이 하늘이 준 복이 아닌가?
주말이면 친구에게 전화해서 차 한 잔 나누며 마누라 이야기와 자식들 자랑을 해도 팔불출의 흉이 아니고 옛이야기처럼 도란도란 나누는 여유로움이 곧 행복이 묻어나는 노년의 삶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가는 세월 보내고 오는 계절 반기는 우리 앞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는 풀꽃들이 만개하여 새로운 철을 여는 봄날, 초록의 보리밭을 보면 까투리가 알을 품듯 고생한 아내가 생각나서 오늘은 가만히 손을 잡아 살며시 끌어안고 지난 세월을 반추해 보고 싶다.
노년은 가는 것도 아니오, 오는 세월을 반기는 삶의 나이테가 뱃살처럼 굵어진 경륜으로 내일 향해 나아가는 만선의 꿈을 안고 출항하는 어부의 삶이지. 나는 오늘도 친구 만나자고 카톡 보내고 푸르름의 세월을 가슴으로 포근하게 감쌀 수 있음이 홍복이라 여겨, 영혼이 깃든 시 한 수와 수필 한 편을 혜안으로 쓰고 다독이는 삶을 살고 싶다. 어서 귀여운 내 손주들과 영상통화를 해야겠다.
△최상섭은 시인이자 수필가로서 <한국시>로 등단하여 9권의 시집과 3권의 수필집을 냈다. 한국미래문화연구원장, 전북문예창작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전북문인협회, 국제펜클럽전북위원회, 행촌수필문학회, 영호남수필문학회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