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산길을 좋아한다. 어머니의 포근한 가슴을 품은 듯 너그럽고 유연한 출렁임이 더 좋다. 은근하고 여린 정취가 묻어 나오는 산골 집 사립문을 열면 물오른 초록 드레스의 창취한 솔 내음이 삼베보자기에 싸서 마시는 기분이다. 산은 음과 양을 지니고 있어 운치가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4계절이 있고 두 팔 벌려 하늘을 올려보면 쇠락한 마음을 가져다준다. 바라볼수록 고요하고 평화롭다. 우러러보면 더욱 높고 자세히 바라보면 견고하다. 앞에서 보면 홀연히 뒤에 있는 것 같고 뒤에서 보면 문득 앞에 있다. 산은 나에게 언제나 예를 갖추라고 다듬어 주며 침묵으로 안아 준다.
산은 자연을 조절하는 조종사다. 이른 봄의 산은 요술 같은 색깔로 말을 건다. 산 그늘의 잔설 사이로 흐르는 차가운 물을 따뜻하게 해 줄 줄도 알고, 멧새들의 지저귐을 들어 주고, 산새들의 목청도 조절해 준다. 그리고 골짜기 논에는 진수성찬을 마련해 주기도 한다.
때로는 겸허해야 한다며 일러 준다. 또 산은 곁두리를 인 아낙들의 속치마를 날리는 짖궂은 장난기도 있다. 오래된 사찰의 돌담 옆 늙은 모과나무도 영글게 해주고 나물 캐는 아가씨들에게 찬란한 꿈도 선물해 줄 때도 있다. 참빗으로 빗은 듯 초록을 가지런하게 해주며 화가를 감동시키는 마력도 있다.
세상 사람들과 피붙이들은 나에게 가끔 고통과 절망을 주었지만 산은 누구에게나 휴식과 위안을 주며 추억을 안겨주고 힘들어 산응 찾는 자들에게는 용기와 희망과 힘을 주었다. 나도 노쇠해지면 산중에 집을 짓고 싶다. 산에 살면서 자연의 꽃밭을 일구어 먼 산의 햇살을 안방으로 초대해 대화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다.
초가삼간이면 어떠랴? 안방은 왕골자리를 깔고, 지금 가지고 있는 버들고리 장은 작은방에 들여놓고, 방에는 학 무늬가 돗자리 깔아 가끔 찾아오는 친구들 쉬어가라 하고 싶다. 진돗개 한 마리도 키우고 울타리가 없으니 온 산이 우리 집 마당이겠다.
봄에는 계곡의 부서지는 물소리를 들으면서 콩도 심고, 옥수수도 심고, 진달래꽃잎을 따서 술도 담그리라, 여름에는 맨드라미 잎을 얹어 시루떡도 빚고 친구들 불러들여 옥수수 쪄 먹으면서 달콤한 매실주도 마시고 매실주에 취해 노근해 지면 뚝배기에 송이버섯을 넣어 된장을 끓여 안주삼아 고등어 등빛 같은 하늘을 바라보며 막걸리도 한 잔 하고 싶다.
가을에는 다래가 익어가고 저녁이면 모닥불에 쑥 내음으로 모기를 쫒고, 별빛들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여 오동잎 질 때면 더덕을 캐다 술 담아 술 좋아하는 작은사위에게 주고 싶다. 장작으로 군불 지핀 방에서 속세를 떠나 온 친구들과 겨울을 맞고 창호지를 발라 말린 창문으로 스며드는 부엉이 소리를 들으며 겨울을 살면 또 다시 봄이 찾아올 것이다.
산은 위대하다. 산 짐승들의 보금자리를 마련해주고 보호해 주는 자비와 덕을 지녔다. 그래서 사람들은 산을 찾고 산에서 살고 싶어 한다. 나는 TV에 나오는 산에서 사는 자연인들을 보면서 그들의 삶이 화려하진 않아도 순수해 보인다.
내가 꼭 이루고 싶은 소망이 있다면 산의 논 몇 마지기 값 마련하여 산골로 들어가 살고 싶다. 그리고 수필과 벗하면서 사는 자연인이 되고 싶다. 산은 무거운 짐을 진 과거를 벗어버린 자들에게 세속의 짐을 벗어 홀가분한 희열을 안겨줄 것이다.
△황복숙은 성심여고 시절부터 꾸준히 수필을 써왔으며 <수필과 비평>으로 등단해 수필집 '그리움이 사는곳'을 펴냈다. 현재 안골수필반 총무를 맡고 있으며 전북문인협회. 대한문학작가회, 전북수필문학회, 온글문학 회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