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우 화백의 미술 이야기] 이주리 작가의 ‘잔상’

이주리 작가 작품/사진=이승우 화백 제공

지역의 여류 중에서 층층시하의 여류, 선배와 후배들 틈에서도 이미 선명한 두각을 보인 작가, 이주리의 초대전이다.

이주리 작가는 이전에는 탄탄한 드로잉을 바탕으로 얼크러진 남자의 나신을 묘사하고 사실적인 채색을 하던 작가이다. 중국 상해의 무슨 미술관과 당시는 매우 놀라운 억대의 작품 매매가 성립되었기 때문에 더 유명세를 누렸다. 더구나 당시 약관의 나이 때문에 더욱 주목받았다.

독신인 작가라서 그림 속에 나타난 모델들이 전부 나체인데, 혹은 모델 한 사람만으로 저 어려운 포즈를 다 연출했을까, 아니면 모델은 여러 명일까 과연 ‘누굴까’, ‘누구들일까’ 라는 의문과 함께 점점 신비로운 작가로 전설화까지 되었던 기억이다.

실제로 ‘누구였다’고 지목되는 사람도 있었다. 당시 남자의 나신 군상들은 서로 얼크러져 모델의 어떤 포즈는 도저히 현실에선 어렵고 고통스럽기까지 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감상객에게 힘들다는 느낌도 주었었다.

여기에서 힘든 포즈에 대하여 한번 집고 가자. 그렇게까지 작가가 모델에게 힘든 포즈를 요구하는 까닭은 평소에 안 쓰는 근육까지를 포함하여 보이게 하는 운동감 때문이이다. 그 예로 그 유명한 로댕의 지옥문 위의 조각 ‘생각하는 사람’이다.

오른쪽 팔로 턱을 고이고 앉아있는 좌상인데, 그 턱을 고인 팔꿈치의 위치가 왼쪽 무릎 위인가 오른쪽 무릎 위인가? 오른쪽 무릎 위라면 편한 자세가 되겠지만 불행히도 ‘생각하는 사람’ 은 왼쪽 무릎 위에 오른 팔꿈치를 얹고 있다. 그만큼 몸을 많이 돌려 원상태로 회복하려는 동세(movement)를 보여주려는 것이다. 그러한 남자 나신, 근육의 표현 때문에 그녀는 비유조차 황송하겠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미켈란젤로를 연상한 일이 있다.

그 한참 뒤, 나와 함께 출품한 DMZ 전에서는 실로 오랜만에 그녀의 작품을 볼 수 있었다. 토끼 모양이라던 한반도 지도에 역시 나신을 구부리고 접어 구겨 넣어 관객들을 놀라게 한 적도 있었다.

그랬던 그녀의 이번 전시작품들인 ‘잔상’ 시리즈를 보고는 "아이쿠 깜짝이야"라는 마음이 덜컥 들었다.

보는 사람들에게 너무나 확실하고 명쾌해서 논리의 딱딱함마저 주던 인체의 드로잉은 자취를 감추고 에곤 실레처럼, 유려한 드로잉으로 변하면서 그 전부를 명확하지 않은 흐릿한 방법으로 처리했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 자신감 넘치는 선도 몇 개는 보이지만 전체적으로는 정말 잔상을 보는듯하게 모호하게 표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늙은이의 눈으로 보이는 것처럼 흐릿하게.

어떤 느낌도 함께 했느냐 하면 "이 작가에게도 노안이 왔고 그 노안까지를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작가 자신의 매너리즘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몸부림일 것이다. 새로운 시선에 대한 갈구일 것이다. 이에 대하여 작가의 변을 직접 들어보자. 나의 기우와는 달리 늙은이의 신체적 노후와 정신적 상태까지를 아우르는 글이 내 생각보다 훨씬 어른스럽다.

이런 일이 없었지만, 생각이 너무 좋아 작가의 말을 소개하겠다. 아아! 나에게만 홀로 세월이 덮친 게 아니라 그녀에게도 세월이 있어 나이를 먹어왔다. 그런데도 갑자기 칠리올라 칭케티의 Non Ho L'eta(나이도 어린데)라는 노래가 흥얼거려진다.

잔상(afterimage). 흐릿해진 시력과 함께 사물도 사람의 기억, 삶에 대한 생각마저도 모호해졌다. 어쩌면 같은데 같지 않을 수 있고, 다르지만 다르지 않을 수 있다는 식의 애매함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다 사라진 것도 다 남아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어렴풋이 반짝이는 잔상들이 남아있다. 그것들은 감정의 변화에 따라 각기 다른 색과 모습으로 한데 어우러져 뭉클 트려 진 또 다른 형상을 보이고 경계 또한 흐트러진다.

사람과 사람, 과거와 미래, 현재의 삶과 죽음 사이에 서로에게 스며드는 관계성과 행복, 기쁨, 슬픔, 화남 등의 감정적 경계에 모호함, 생각의 충돌, 세상을 살아가며 자아를 찾기 위한 무수한 갈등 등의 혼재된 미묘한 차이에서 나는, 그들은⋯ 담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 의문을 품으며 각기 모습의 잔상을 떠올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