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나의 오전 루틴은 부엌에서 가스 불 스위치가 아닌 컴퓨터 전원을 켜는 일입니다. 그날도 오랜만에 떠오른 시상을 잊어버릴 새라 서재에서 키보드를 두드리는데, 거실에 누워 음악 감상에 심취해 있는 남편이 큰소리로 나를 부릅니다. "이 곡 들어봐. 당신 좋아하는 곡이네“.
쇼팽의 야상곡이 나오니 볼륨을 높이고 나를 부른 겁니다.
“잘 들립니다.” 우리 부부의 하루는 이렇게 자기만의 공간에서 각자 코로 숨을 쉬며 하루가 시작 됩니다.
창밖은 봄 비가 내릴 듯 말듯 엉거주춤 하고 일기예보에서는 잠시일지라도 오늘부터 추워진다고 합니다. 잠시 후 남편은 나를 또 부릅니다. “점심은 뭐 먹을까” 라고,
실은, 나도 눈과 손은 컴퓨터에 있었지만 머릿속은 점심을 무엇으로 하나“ 그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젊든, 나이 듦이든 주부들의 매일매일 펼쳐진 숙제는 식사 메뉴일 것입니다. 우리 집도 그렇습니다. 국이든 찌개든 둘 중에 하나는 꼭 있어야 하는 게 기본이고, 어제는 떡국을 만들었는데 오늘은 무엇으로 입맛을 맞춰야하나 가 고민입니다. 삼식이 아내로 사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전에, 그러니까 지금 보다 조금 젊었을 때는 준비하는 과정이 귀찮기도 하고 맛 타령까지 하는 투정에 힘이 들어 짜증을 부리기도하였건만 이제는 불평 없이 준비합니다. 살아오는 동안 나의 마음도 무뎌졌고 또 남편 건강이 곧 우리 가족의 건강이기도하니까요.
5년 전, 건강검진에서 내 몸속에 작은 불청객이 찾아왔음이 발견되어 치료를 크게 받았습니다. 남편은 집안 청소며 설거지를 묵묵히 도와 주더니 완치 후에도 여전히 솔선수범입니다.
그 고마움에 나는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라서 순종을 합니다. 간혹 내 마음을 우울하게 할 때도 있지만...어제는 떡국에 고명도 얹혔습니다. 오늘 점심은 간단하게 누룽지를 끓여먹으면 좋을성싶은데 국수가 먹고 싶다하여 삶았습니다.
하지만 더 힘든 건 남편 입맛입니다. 국수도 진한 멸치 육수를 만들어야 하고 바지락도 넣어야 하고 양념은 이것저것 골고루 갖춰야하는 주문 성향이 까다로운 고객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파 송송 계란 탁! 추가주문이 이어지면 동작 그만! 이라고 외치고 싶어도 어디서 인내심이 고여 있다가 쏟아지는지 나는 부드러운 종달새가 됩니다. 아마도 아팠을 적 나를 챙겨주었던 고마운 모습이 오버 랩 되어 다가온 게 아닌가 싶습니다.
어제는 대봉시가 맛있게 얼었기에 “이거 좀 먹어봐요”, 했더니 먹어보라고 했다며 답안지를 내줍디다. “잡수세요. 혹은 드셔 보세요” 라고 하여야 한다며 말투가 왜 그러냐는 겁니다.
이젠 이런 대화에도 별스런 감흥이 없습니다. 그저 내 발목이 아프지 않고 허리나 건강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올해는 남편이 팔십이라는 숫자를 맞이하는 해입니다. 새로운 나랏님 덕에 한 살이 줄었지만 우리 때 계산으로는 여든입니다.
듣기 싫지만 신문지상에는 고령자라고 호칭을 사용하기도 하고 어르신이요 영감님이라는 호칭으로도 불리기도 합니다.
엊그제까지 귀에 익은 아저씨는 어디가고, 귀에 익숙하지 않는 할아버지가 되었는지 나이 듦에 서글퍼지기도 합니다.
해 질녘이면 어미 잃은 강아지마냥 처마 밑에 앉아 집에 가고 싶다고 훌쩍이던 새댁 시절의 내 모습을 그려보니 우리가 씨줄날줄로 살아온 세월이 어느 새 50년이라니요.
장인, 장모가 되고 할아버지라고 불러도 어색함이 없이 “오냐!” 반기는 노부부가 되어버린 우리!
이제는 서로가 바늘과 실이 되어 외출에서 조금이라도 늦어지는 날이면 가슴에서 철거덩 소리가 납니다. 행여 무슨 일이라도...하는 방정맞은 생각이 앞서고 심장이 벌렁거립니다.
부부는 이렇게 보이지 않는 아득한 먼 길을 함께 걸어가는 가 봅니다.
따스한 바람이 부는 봄날이 오면 시들어버린 나를 찾으러 만경강 물길따라 만들어진 ‘옴서감서 쉼터’ 길을 가보고 싶습니다.
국토교통부에서 그곳에 어울리는 시를 찾고 있던 중 운 좋게 ‘저문 날의 생각’ 이라는 나의 시가 선택이 되어 시비(詩碑)가 세워진 곳입니다.
싯귀처럼 ‘그리움 하나 걸어놓고’ 물가에 한참을 앉아있고도 싶어집니다.
그리곤 돌아오는 길에 ‘당신’이라는 유행가 한 자락을 남편에게 청하려합니다. “이 생명 다 하는 날까지 당신을 사랑하리”라는 노랫말 끝부분을 가장 좋아한다고 멋쩍은 고백도 해보려고요.
△박지연 시인은 경희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한국 문인협회 회원 및 전북 여류문학회장을 역임했다. 저서는 시집 <사랑은 어디쯤 가고 있는가>, <그 이름을 부르노니>와 시와 산문집 <촌스러움에 대한 보고서>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