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의 5백원 지폐와 새만금

며칠 전 햇감자축제가 성황리에 열렸던 김제시 광활면(廣活面)은 김제에서도 가장 서쪽에 있는 곳이다. 이름만 봐서는 막힌 데가 없이 매우 넓을 것 같은데 사실은 아주 작은 면이다. 1920년대 일제의 산미증산계획에 의해 방조제가 축조되면서 면 전역이 간척사업으로 생겨났다. 쌀이 넘쳐나는데 구태여 무슨 간척사업을 했을까 생각할 수도 있으나 사실 반만년 동안 굶주렸던 일반 서민들이 배고픔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간척사업에 힘입은 바 크다. 우리나라 전체 농지 중 간척농지는 무려 11만 2000ha(1120㎢)로 서울시의 두배에 달한다. 이는 전체 농경지의 7%가 넘는 수치다. 피땀을 흘려 조금씩 농경지를 늘려간 것이 최근 100년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선과정에서 정치공학적으로 시작한 측면이 없지 않으나 새만금간척사업도 어쨋든 처음엔 전체를 농경지로 쓸 예정이었다. 이후 계획을 변경해 30%만 농경지로 사용하고 70%는 산업단지나 관광단지 등으로 활용키로 했다.

간척사업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게 바로 서산에 있는 천수만 간척지다. 당시 7.7㎞에 달하는 방조제를 쌓던 중 9m에 달하는 조수간만의 차, 초당 8m의 거센 조류 때문에 승용차 크기만 한 커다란 돌을 퍼부어도 물살을 버텨내지 못했다. 고심하던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것을 생각해냈는데 고철로 쓰기 위해 들여온 대형 유조선(23만t)을 방조제 구간에 가라앉히는 공법이었다. 소위 정주영 공법인데 당시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와 ‘타임’에도 소개됐다. 정경유착 등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으나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도전정신은 조선소 건설 때 최고조에 달한다. 조선소를 짓기위해 영국 최고 은행이던 바클레이은행과 큰 금액의 차관도입을 협의했는데 은행측은 손사래를 저었다. 이에 정 회장은 1971년 9월 바클레이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선박 컨설턴트 회사인 애플도어 롱바텀 회장을 찾아갔다. 그 또한 고개를 가로젓자 정 회장은 지갑에서 지폐 한장을 꺼내 들었다. 거북선 그림이 그려져있던 500원짜리 지폐였다. 400년전 이미 정교한 큰 배를 만든 경험이 있다는 메시지였다. 결국 추천서를 받아낸 정 회장은 차관도입을 통해 2년여만에 조선소를 완공해낸다. 애물단지 취급을 받던 새만금사업이 요즘 산업생태계의 메카로 부각되는 분위기다. 지난 8년간 100만평에 불과했던 산업단지 분양면적이 최근 1년동안에 무려 120만평이 매각됐다고 한다. 산업단지의 경우 전체 9개공구 약 540만평중 1, 2, 5, 6단지가 사실상 분양완료되고 3, 4, 7, 8지구 약 300만평은 빨라야 향후 2년후부터나 공급 가능하다고 하니 그야말로 상전벽해다. 지금까지 33년 계속된 새만금사업이 개발완료되려면 앞으로도 20년 남짓한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게 전문가들의 관측이다. 이차전지 특화단지는 도약의 첫 걸음인데 향후 정주영의 500원 지폐로 상징되는 기업가 정신으로 무장된 글로벌 회사들이 새만금지역으로 몰려올 날도 이젠 머지않아 보인다. 위병기 수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