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승자의 기록인가? 이에 대해 <역사란 무엇인가>를 쓴 E.H. 카는 “역사는 불가피하게 일종의 성공담이라 할 수 있다”고 대답한다. 그렇다. 후삼국 역사 역시 철저한 승자의 성공담이다. 특히 견훤왕과 왕건이 서남해안 장악을 위해 영산강을 둘러싸고 벌이는 전투는 역사가 승자의 기록임을 여실히 웅변해 준다. 가는 곳마다 승자인 왕건을 칭송하는 지명으로 도배돼 있음이 그것을 증명한다. 몽탄강, 파군교, 주룡나루, 용봉마을, 왕자봉 등등.
무진주(광주)에서 900년 전주로 옮겨, 도읍을 정한 견훤왕은 국가체계가 어느 정도 안정되자 영산강 유역과 서남해안 공략에 나선다. 이곳은 뱃길로 중국·일본 등과 바로 통하는 대외교류의 창구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중심도시 나주는 인근 물산이 모이는 경제적 요충지였다. 영산강 일대 제해권을 둘러싼 물고 물리는 공방전은 909년부터 914년까지 6년에 걸쳐 8차례 벌어진다. 당시 영산강 일대는 1981년 영산강하구둑을 막기 전까지 바닷물이 내륙 깊숙이 들어왔다. 내해(內海) 또는 만(灣)을 이룬 것이다.
일행은 광주 한국학호남학진흥원에서 박해현 교수(초당대)를 만나 나주로 향했다. 나주에서는 박경중 전 나주문화원장(77) 등이 기다리고 있었다. 박 원장은 자신이 자란 용봉마을로 우리를 안내했다. 이들은 용봉마을이 견훤왕의 군대와 왕건의 군대가 마지막 격돌했던 장소라고 소개했다. 이 마을은 지금 광주시 광산구 용봉동이 되었지만 예전에는 나주군 관할이었다. 견훤왕은 광주 쪽에서 내려오고 왕건은 나주 쪽에서 올라와 승촌보 일대에서 전투가 벌어졌다는 것이다. 용봉마을 앞 왕자봉에는 왕건의 군대가, 영산강을 사이에 두고 멀리 보이는 견훤봉에는 견훤왕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고 한다. 박 원장은 “그 앞 들판을 견훤뜰로 불렀는데 싸움이 치열해 시체가 산을 이루고(積屍如山), 핏물이 한 달을 흘렀다”고 들려준다. 이에 대해 박 교수는 “912∼913년쯤일 것”이라고 거든다. 여기서 용봉마을의 용은 왕건을 가리킨다.
일행은 용봉마을 얘기를 뒤로하고 덕진포해전이 벌어졌던 영암군 덕진면으로 향했다. 나주를 중심으로 한 서남해안은 후백제의 뒷마당에 해당한다. 후백제 입장에서 이곳을 점령하지 못하면 목 뒤에 비수를 든 적을 두고 있는 셈이다. 덕진포 해전은 909년 1차, 912년 2차에 걸쳐 일어났으며 1차 해전은 견훤왕과 왕건이, 2차 해전은 견훤왕과 궁예왕이 붙은 싸움이다. 1차 덕진포 해전을 위해 견훤왕은 직접 선단(船團)을 이끌고 서해를 거쳐 영산강 내해로 진입했고 무주 성주 지훤은 육군을 이끌고 참전했다. 수륙병진정책을 전개한 것이다. 견훤왕은 서남해 부속도서를 먼저 점령한 후 영산강 하구를 거쳐 내해로 진입했다. 이러한 소식을 접한 궁예왕은 바다를 잘 아는 왕건을 나주지역으로 파견했다. 당시 왕건 가문은 송악과 그 일대 서해안의 해상세력을 장악하고 부를 축적한 호족이었다. 왕건은 서해를 따라 내려오다 염해현(鹽海縣 지금의 무안군 해제면 임수리 부근)에서 진용을 정비했다. 이곳에서 후백제군과 교전을 하지 않고 염탐활동을 하다 견훤왕이 중국 오월국으로 보내는 국서를 휴대한 선박을 붙잡아 마진으로 돌아갔다. 내친김에 궁예는 왕건에게 2500여 군사를 주어 다시 내려보냈다. 왕건은 진도와 고이도를 점령한 후 영산 내해로 진입했다. 그때 이미 후백제군은 목포(지금의 나주 영산포)와 반남현 석해포, 그리고 주력부대가 포진한 덕진포 등 3곳에 배치돼 있었다.
“견훤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전함들을 포진시켜 목포에서 덕진포에 이르기까지 전함이 서로 종횡으로 연결되고, 바다와 육지에 군사의 세력이 심히 강성하였다. 그것을 보고 우리 장수들은 근심하는 빛이 있었다. 태조는 ‘근심하지 말라’ 며 (중략) 급히 공격하니 적선들이 조금 퇴각하였다. 이에 바람의 흐름을 타서 불을 놓으니 적들이 불에 타고 물에 빠져 죽는 자가 태반이었다. (중략) 견훤은 작은 배(小舸)를 타고 도망했다.”(<고려사> 권1)
우세했던 후백제군은 <고려사>에서 기술하듯 적벽대전과 같은 화공작전에 걸려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 <고려사>의 내용은 사실일 수 있으나 승자인 당당한 왕건과 초라한 견훤을 대비시키고 있어 작위적 느낌도 없지 않다. 몽탄지역에 내려오는 설화 역시 왕건 편이다. 몽탄은 지금의 무안군 몽탄면과 나주시 동강면 사이를 연결하는 나루다. 설화에 따르면 왕건이 견훤과 싸우다 영산강의 한 구간인 몽탄강(夢灘江) 부근에서 포위되었다고 한다. 그날 밤 꿈에 신이 나타나 강물이 빠졌으니 피하라고 해서 허겁지겁 도망해 살았다는 것이다. 이후 왕건은 자신을 추격하는 후백제군을 파군천(破軍川)에서 격파했다.
1차 덕진포 해전 이후 후백제군은 석해포-성주산-자미산성으로 이어지는 방어선을 구축했다. 다음 해인 910년, 견훤왕은 패전의 치욕을 씻기 위해 나주성을 공격했다. 여기서 나주성은 후대에 축성된 나주읍성이 아니라 금성산성으로 추정된다. 나주성을 10여일 동안 맹렬히 공격하자 궁예는 수군을 보내 후백제군의 배후를 기습했다. 또다시 후백제군은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후백제군이 열세에 몰린 것은 오다련 등 서남해 호족세력을 끌어안지 못한 게 원인이 아닐까 한다.
이후에도 영산강을 둘러싼 공방전은 계속되다 912년 제2차 덕진포해전이 일어난다. 견훤왕은 나주와 서남해안을 잃음으로써 항상 뒷마당이 불안했다. 912년 다시금 군사를 일으켜 덕진포에서 격돌하게 된다. 이번에는 궁예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내려왔다. 이에 대한 기록은 자세하지 않으나 결국 후백제는 영산강 일대를 내주고 만다. 또 914년에는 견훤왕이 군소 호족세력을 포섭해 반기를 들도록 하자 궁예왕는 다시 왕건에게 3000명의 병력을 주어 평정케 한다. 이후 후백제는 15년이 지난 929년에야 서남해 일대를 차지했다. 1차와 2차 덕진포해전에서 사용한 후백제 배는 재목이 울창했던 부안 검모포에서 만든 것으로 보인다.
덕진포는 지금 조그만 하천에 불과하지만 예전에는 월출산에서 내려온 물이 모이는 등 마한 백제 때 꽤 큰 항구였다고 한다. 김한남(76) 영암문화원장은 “이곳은 해남 등 남해안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길목으로 사람의 왕래가 잦았다”며 “다리가 없어 불편했는데 통일신라 말(후백제)에 강변에서 주막을 하는 덕진이라는 여인 덕분에 다리가 놓아졌다”는 설화를 소개한다. 그러면서 이곳에서 1.5㎞ 떨어진 곳에 장보고가 태어난 선암마을이 있다고 알려준다.
일행은 견훤왕의 군대가 주둔해 있었다는 나주시 반남면 자미산성을 들른 뒤, 광주시 북구 생용동으로 향했다. 이곳은 순천만과 광양일대에서 거병하여 여수, 고흥. 곡성, 구례 등 전남 동부지역을 장악한 후 오늘의 광주인 무진주로 호응을 받으며 입성한 곳이다. 892년 처음 자리를 잡아 세력을 키우다가 나중에 무진고성 옆 시가지로 치소를 옮긴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유사>에 실린 ‘광주 북촌’의 지렁이 설화를 근거로 이곳이 견훤왕의 탄생지라는 주장도 있으나 다수 학자들은 혼인설화가 탄생설화로 바뀐 것으로 보고 있다. 견훤왕이 이곳에서 건국의 기초를 다지며 토착 호족세력과 혼인관계를 맺었다는 해석이다. 이와 관련해 동행한 송화섭 교수는 “지렁이 설화는 동서고금을 통해 찾아보기 힘들다”면서 “당초 용자(龍子)설화를 패배자인 견훤왕을 비하하기 위해 변이시킨 것”이라고 주장한다.
‘용이 태어난 동네’라는 생용동에는 용(龍)자가 들어간 지명이 10개가 넘는다. 구룡(九龍) 생룡(生龍) 복룡(伏龍) 오룡(五龍) 신용(辛龍) 청룡(靑龍) 용강(龍江) 용두(龍頭) 용산(龍山) 용전(龍田) 등이 그러하다. 생용마을 뒤, 죽취봉(竹翠峰) 쪽으로 가파른 구릉을 따라가면 토축으로 쌓은 성터 흔적이 나온다. 예부터 견훤대 또는 후백제성이라 불렸다고 한다. 이곳은 광주 시가지에서 보면 산들로 가려 있어 은거하기에 좋은 곳이다. 금성 범씨(范氏) 25대 손으로 대대로 이곳에서 살아온 범희인(87)씨는 “성안에는 견훤왕이 군사를 훈련시킨 조련대, 공부를 가르친 서당골, 잘못하면 감옥에 가둔 옥도골 등 당시 명칭이 지금도 전해 온다”고 들려준다. 만일 견훤왕이 성공한 군주였다면 이곳은 역사적 명소로 가꾸어졌으리라.
끝으로 찾은 곳은 광주의 상징인 무등산에 자리한 무진고성. 이 성은 광주시 산수동 오거리에서 원효사 쪽으로 구불구불한 도로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잣고개’라는 산등성이에 자리하고 있다. 잣고개는 ‘성이 있는 고개(城峙)’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 고개 양편으로 길게 쌓아 올린 성벽이 마치 새의 양날개처럼 날렵하게 복원돼 있다. 남북 1㎞, 동서 500m의 장타원형으로 축조된 포곡식 산성이다. 둘레는 3.5㎞다. 박 교수는 “광주제일고 생활관 신축과정에서 1994년 나온 누문동(樓門洞) 및 무진고성 유물로 보아 후백제 치소성으로 보기는 부담스럽다”며 “피난성일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전체적으로 광주·전남의 후삼국 당시 지역별 분포를 보면 광주와 나주 및 서남해안은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광주를 비롯한 영산강 상류지역의 호족들은 견훤왕을 지지해 끝까지 견훤왕과 운명을 같이했다. 반면 나주와 영산강 중하류의 호족들은 왕건을 지지해 고려를 탄생시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조상진 논설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