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그리고 정전 70주년](중) 민간인 600명 학살, 임실 ‘오소리 작전’

1951년 국군 제11사단 13연대 등 전북지역서 수복·토벌
일제 때 금광으로 사용됐던 폐광굴로 피난민·주민 피신
빨치산으로 몰아 폐광굴 내 불 피워 질식사 또는 총살

전북일보 엄승현 기자가 임실 청웅면 남산리 남산광산 갱도 일부를 확인하고 있다. /엄승현 기자

1950년 7월 20일. 전주에 입성한 인민군은 김제를 거쳐 정읍, 순창 방면으로 진격했다. 이후 전북 전역을 전령한 인민군은 각 지역에 인민위원회를 구성했고 일부 시민들은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인민활동을 해야만 했다.

그러던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으로 한국전쟁의 전세가 역전되자 대한민국 군경은 지역별로 수복 작전에 돌입했다. 9월 20일, 유엔군이 군산 앞바다 오식도에 상륙했고 전북 경찰국 선발대는 9월 28일 전주를 수복했다.

전황이 변하자 인민군은 후퇴를 결정하고 소백산맥과 태백산맥을 이용해 북상, 이때 후퇴하지 못한 인민군은 지방 좌익과 합류해 유격 활동을 전개했다.

전북에서는 회문산, 내장산, 운장산, 덕유산 등 산악지역을 중심으로 빨치산 유격지구가 형성됐으며 우리나라 국군 제11사단 20연대 및 13연대와 경찰은 수복 작전과 토벌 작전을 전개했다.

이 과정에서 다수의 민간인이 적법한 절차 없이 희생되거나 행방불명됐다.

특히 임실 청웅면에 위치한 남산광산은 전쟁을 피하고자 했던 피난민 등이 빨치산으로 몰려 학살된 대표적인 장소이다.

국립임실호국원 뒤편에 위치한 임실 청웅면 남산리 남산광산은 일제 강점기 시절 조선인들이 일본으로부터 노동력 등을 착취당했던 아픔의 장소다. 

남산광산은 굴 입구만 32곳에 달할 정도로 규모가 꽤 컸는데 이 때문에 한국전쟁이 당시 전쟁을 피하거나 또는 징병을 피하려는 주민들의 피난처로 이용됐다.

최정근 한국전쟁유족회 사무국장(당시 4세)은 “아버지(당시 38세)가 일제시기 금광에서 반장으로 일해 갱도를 잘 알고 있었다”며 “당시 아버지는 징병 등을 피하려는 큰형님(당시 16세)과 주민 등을 안내해 광산으로 들어갔다. 빨치산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러던 1951년 3월 14일. 남산광산 굴속에 많은 공산유격대와 협력 주민들이 있다는 정보를 받은 국군 제11사단 13연대 2대대 병력과 임실경찰서 전투경찰, 반공청년 단체인 향토방위대 등은 ‘폐광굴 분화 작전’ 일명 ‘오소리 작전’을 전개한다.

이들은 32곳의 출입구 중 28곳을 폐쇄하고 4개 굴 입구에 고춧대와 생솔가지를 쌓아놓고 불을 질러 연기를 안으로 들어가게 했다.

서로 연결돼 있던 갱도에 연기가 유입되자 순식간에 내부를 가득 채웠고 이에 호흡 곤란을 겪은 일부 주민들이 폐광 굴을 나왔다. 하지만 이들이 마주한 것은 국군의 총탄이었다. 또 폐광굴을 나오지 못한 주민의 경우는 매캐한 연기 속에 질식해 죽었다.

우연히 그곳에서 살아남은 일부는 인근 초등학교로 끌려가 빨치산으로 몰려 매질에 죽어가기도 했다.

임실 청웅면 남산리 남산광산 갱도 일부/엄승현 기자.

최 사무국장은 “오소리 작전이 전개되고 지역 어르신이 둘째 형에게 아버지가 폐광굴에서 죽었다고 전해 둘째 형이 아버지 시신을 모셔왔다”며 “큰 형님은 일부 살아남은 20여 명과 함께 폐광굴에서 청웅초등학교로 옮겨 감금됐는데 이때 빨치산으로 몰려 우익청년단의 몽둥이질에 숨졌다”고 기억했다.

실제 본보가 찾은 남산광산은 세월의 흔적과 전쟁의 참혹함에 무너져 그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급경사와 가시덤불 등을 헤치고 입구를 발견했으나 좁은 입구에 출입이 어려웠다. 

하지만 굴 내부에서 뿜어져 나오는 찬 공기를 통해 이곳이 갱도임을 유추할 수 있었고 그 깊이를 알 수는 없지만 굴 내 벽 위쪽 어렴풋이 보이는 검은 흔적에 참상이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유추할 수 있었다. 

남산광산에서 희생된 민간인은 누군가의 친구이자 가족이었을 뿐 빨치산은 아니었다고 한다. 

한국전쟁유족회에 따르면 당시 희생된 민간인 수는 596명으로 이들 중 일부는 여전히 남산광산에 묻혀 가족에게 돌아가지도 못 한 채 역사의 뒤안길에서 잊혀져 가고 있다.

최정근 한국전쟁유족회 사무국장은 “국가에 의해 자행된 폭력의 피해를 이제는 제대로 보상해 줘야 한다”며 “이러한 노력을 통해 역사를 바로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엄승현·송은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