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는 성장과 발전의 눈부신 시간을 맞았다가도 어느 사이 쇠퇴의 시간을 맞게 된다. 도시가 끊임없이 성장동력을 찾는 이유다.
일본이 쇄국정책을 펼치던 시대, 서양 문물을 가장 먼저 받아들였던 나가사키, 한때는 일본의 3대 항구로 번성했던 모지항을 안고 있는 기타큐슈도 쇠퇴의 위기에서 성장동력을 찾아 나선 도시들이다.
도시의 교육문화시설, 관광 콘텐츠가 된 역사 공간
◇나가사키 <데지마>
나가사키는 요코하마, 고베, 니가타, 하코다테와 함께 일본의 대표적인 개항 도시다. 교류를 위해 항구를 연 시기는 각기 다른데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항구를 연 도시는 나가사키다. 그러나 나가사키의 교류 역사는 본격적인 개항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데지마(出島)>는 일본의 쇄국정책 속에서도 유일하게 서유럽에 개방되었던 창구다. 데지마가 일본의 근대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 것은 이 때문이다.
나가사키 항은 1571년 포르투갈과 처음 무역을 시작했다. 1859년에 항구를 열었으니 270여 년 전에 이미 서양과 교류하는 문을 열었던 셈이다. 이후 나가사키 항은 본격적인 교류와 무역항이 되었는데 그 통로가 된 곳이 데지마다.
데지마는 1634년에 축조를 시작해 1636년에 완성된 인공섬이다. 포르투갈인들의 기독교 포교 활동을 금지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부채꼴 모양으로 조성된 이 인공섬에는 나가사키에 들어와 시내에 흩어져 살고 있던 포르투갈인들을 모아 거주하게 했다. 그러나 1637년 지방 관리들의 횡포와 과중한 징세를 견디다 못해 기독교인들이 민란(시마바라의 난)을 일으키자 일본은 포르투칼 배가 들어오는 것을 막고 포르투갈인들을 국외로 추방했다. 포르투갈인들이 떠나고 사람이 거주하지 않는 무인섬이 되자 일본 정부는 히라도에 있던 네덜란드의 무역상사와 상관을 데지마로 이전하게 했다. 서양의 학술, 의학, 문화가 들어와 일본 근대화에 큰 역할을 하게 된 또 하나의 계기였다.
데지마는 이후 200여 년 동안 일본의 유일한 해외 무역 창구로 역할을 해왔다. 1860년대에는 외국인 거류지로 편입되면서 더 번성했으나 나카시마 강의 공사로 데지마의 북쪽이 깎이고, 항만 개량공사로 남쪽이 매립되면서 부채꼴 인공섬은 원형을 잃게 됐다. 일본 정부는 1922년 ‘데지마 네덜란드 상관 터’를 국가사적으로 지정했다.
데지마 복원이 시작된 것은 1951년이다. 사적 안 사유지의 공유화를 진행하면서 1982년에는 장기적이고 종합적인 복원 정비 구상을 세웠다. 1992년에는 나가사키시에 ‘나가사키시 데지마 사적 복원정비연구회’를 설치해 데지마 사적을 교육문화시설로 조성하고 나카시마 강 맞은편 지역을 도시공원으로 조성하는 도시계획을 추진했다.
사적 ‘데지마 네덜란드 상관 터’ 복원이 시작된 것은 1996년이다. 복원 작업은 중단기와 장기 3단계로 나눠 진행되고 있다. 서북 중앙 동남의 구역을 순서대로 3단계로 나눠 19세기 초의 건축물과 주변 환경을 복원해 내는 사업이다. 이 정비계획에 따라 인공섬 안의 건조물과 섬 주변의 돌벽, 정문 다리를 복원하는 사업이 우선 추진됐다. 장기적으로는 19세기 초의 데지마 완전 복원이 목표다. 사적 안의 사유지를 완전히 공유한 것은 2001년, 사업을 시작한 때로부터 50년이 걸렸다.
2006년, 데지마는 건조물 대부분을 복원하고 돌벽과 담을 정비해 다시 문을 열었다. 오늘날 마주하는 데지마는 되살려낸 거리와 복원해 낸 건축물들이 방문객들을 수백 년 전 과거로 안내한다. 복원된 건물들은 전시와 체험을 위한 자료를 통해 각각의 기능을 그대로 보여준다. 당시 일본에 살던 포르투갈인과 네덜란드인의 생활을 재현한 그림과 모형이 전시된 사료관이나 1904년 매립되기 전의 데지마를 15분의 1로 축소한 데지마 모형과 네덜란드 무역상사를 실물 크기로 재현해 놓은 전시실은 특히 관광객들의 시선을 끌고 있다.
수백 년 전, 서양과의 교류 창구였던 데지마는 이제 나가사키의 역사를 새롭게 인식시키는 관광 콘텐츠의 거점이 됐다. 일본에서는 초·중·고등학생들의 수학여행지로 손꼽히는 역사적 공간이기도 하다. 내부의 건축물과 돌로 된 벽, 수로와 정문 다리까지 온전히 복원된 데지마는 낮과 밤의 풍경이 서로 다른 아름다움으로 눈길을 끈다. 도시 재생이 단순한 정비나 복원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도시의 장기적인 구상을 실현하는 통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사례다.
행정과 민간 협력의 결실, 쇠락한 항구의 변신
◇기타큐슈 <모지항 레트로>
모지항은 일본 혼슈(가장 큰 섬)와 규슈를 가로지르는 간몬해협에 있는 항구다. 1889년 국가의 특별수출항으로 지정돼 20세기 중반까지 중계무역항으로 기능을 했다. 중계무역을 통해 무역항으로 자리 잡은 모지항은 대륙으로의 전진기지 역할을 하며 번성했다. 1894년 청일전쟁, 1904년 러일전쟁 때에는 군수 물자를 수송하는 중요한 수송항이 되기도 했다. 이후에도 중국 본토와의 근접성으로 군수품과 병사들을 내보내는 중요한 항구로 활용됐으며, 유럽 항로 기항지가 되자 대륙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만주 등지로 오가는 무역선과 여객선으로 붐볐다. 특히 이 시기에는 고베, 요코하마와 함께 일본 3대 항구로 꼽히며 중요한 국제무역의 거점으로 자리 잡았고, 1914년 모지항역이 조성되면서 더욱 번성해 일본 대표 무역항이 되었다.
그러나 1942년 간몬해협을 가로지르는 간몬터널이 개통하면서 배가 아닌 기차로 물자를 수송할 수 있게 되자 수출항의 기능이 약화되면서 지역 경제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대부분 항구가 이런 과정을 거쳐 새로운 활로를 찾듯이 모지항도 ‘개발’을 내세운 정비 사업을 시작했다.
변화가 시작된 것은 1960년대다. 1960년 쓰에요시 시장이 취임하면서 내놓은 항구 활성화 계획 ‘기타큐슈 르네상스 구상’이 발판이 됐다. 모지항은 재정비 시행 초기, 위기를 맞았다. 근대기에 조성됐던 역사적 건축물들이 개발을 앞세워 해체 위기에 놓인 것이다. 언론과 지역 주민들이 나서 개발계획을 비판하며 보존 운동을 벌였다. 항만 매립이 중단되고 도로 계획도 다시 세워졌다. 이때 만들어진 재정비 사업의 주제는 ‘역사와 자연’이었다. 때마침 일본 정부의 고향 만들기 특별 대책사업에 모지항 재정비 사업이 포함되면서 예산도 확보됐다. 정비 개념은 모지항의 역사를 주제로 하는 ‘레트로(Retro)’. 옛 광장과 이야기를 간직한 근대 건축물들, 수변 가로까지 항구를 중심으로 조성된 역사적 공간과 분위기가 ‘모지항 레트로’란 이름의 사업으로 추진됐다.
1988년 본격적인 항구 재생 사업이 시작됐다. 모지항 곳곳에 있던 10여 동의 근대 건축물을 항구를 중심으로 이전하거나 복원해 근대사를 껴안은 모지항의 풍광을 만들어냈다. 1995년에는 행정과 민간이 협력해 ‘모지항 레트로 클럽’을 결성했다. 더 새로운 활로를 찾아 한 번 더 도약하겠다는 목표가 있었다. ‘모지항 레트로 클럽’을 중심으로 지역 주민과 상인, 행정이 협력해 모지항 관광 활성화를 위한 다양한 활동을 벌였다. ‘모지항 레트로 클럽’은 주민과 지자체가 함께 단체를 만들고, 자원봉사자와 기업이 참여해 지역을 살려낸 모범 사례다.
모지항은 1995년 3월 재개장한 이후 정부의 지원이 더해지면서 활력을 찾았다. ‘개발’만을 앞세워 낡고 오래된 공간을 없애지 않고 역사 자원으로 활용해 관광 콘텐츠로 이어낸 지혜로운 선택의 결실이다.
재정비 사업으로 새롭게 문을 연 이후 모지항의 관광객 수는 크게 늘었다. 최근 2~3년 동안 이곳도 코로나의 영향을 받았지만, 다시 활기를 찾아가는 중이다. 모지항은 쇠퇴하던 무역항에서 관광지로 변신했다. 그러나 모지항 역시 인구 증가에는 변화가 없다. 관광객은 늘었지만, 실제 주민 인구 증가로까지 이어지지 않는 상황은 모지항의 과제다
기타큐슈시 산업경제국 쓰지모토 에리카 진흥계장은 “젊은 층 유입을 가장 큰 과제로 삼고 있다”며 “젊은 세대가 찾아올 수 있는 5개년 발전 방안을 담은 실천 계획을 추진 중”이라고 소개했다. /일본 규슈=김은정 선임기자, 천경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