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만난 전북- 녹두장군 전봉준

양중진 법무법인 솔 대표변호사

38년 전의 일입니다. 남원역에서 통일호 기차를 타고 대학교 원서를 내러 처음 서울이라는 곳을 갔지요. 그야말로 별천지였습니다. 세상에 이런 곳도 있구나! 중학교 1학년 시절 처음 기차를 타고 남원에서 전주를 갔을 때 느꼈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여의도를 지날 때 보았던 63빌딩의 위용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을 정도였지요. 

그때부터 제 생활의 주무대는 남원과 전주를 떠나 서울이 되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안암동과 종각역, 이대앞이었지요. 지금은 강남역, 가로수길, 압구정처럼 핫플이 많아졌지만, 당시만 해도 최고의 핫플은 종각역이었습니다. 저도 주로 그곳에서 친구들을 만나고 미팅을 하곤 했지요. 

오랜만에 대학 시절을 추억하며, 추억의 핫플을 가보았습니다. ‘서울에서 만난 전북’을 확인하기 위해서였지요. 지하철 1호선 종각역, 5번 혹은 6번 출구로 나와 뒤를 돌아보면 그가 있습니다. 오랜 감옥 생활과 모진 고문에도 여전히 살아있는 형형한, 무엇에도 굴하지 않는 눈빛을 가졌습니다. 바로 녹두장군 전봉준입니다.

그는 1855년 1월 15일 태인현, 지금의 정읍시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 농민들의 사정은 비슷했지만 세 마지기의 논밭으로 온 가족이 먹고살기에 세상은 너무나 배가 고팠지요. 그마저도 탐관오리들의 수탈로 온전히 식구들의 입으로 들어가긴 어려웠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농민들이 일어선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겁니다. 나라가 나라다우려면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것이 백성의 안전과 배고픔이지요. 조선은 건국 이래 그런 기본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임진왜란 때 그랬고, 병자호란 때 그랬습니다. 당시에도 상황은 바뀌지 않았지요.

그가 이끄는 농민군은 한때 전주성을 점령했지만, 우금치에서 패한 후 일본군에 쫓기게 되었지요. 결국 옛 부하의 밀고로 체포된 후 서울로 압송돼 전옥서(典獄署)에 수감되었습니다. 전옥서는 형조와 의금부에서 취조하는 중죄인들을 가두어두는 지금의 구치소 같은 곳이었지요. 바로 그 전옥서가 있던 자리에 장군의 동상이 세워졌습니다. 

포털 사이트에 ‘전봉준’을 검색하면 가마 위에 타고 있는 사진을 볼 수 있습니다. 일본영사관에서 취조를 받은 후 전옥서로 압송되던 당시의 사진입니다. 혹독한 고문으로 제대로 걷기 어려워 가마에 탈 수밖에 없었다고 하지요. 그럼에도 그의 눈빛은 여전합니다. 

1895년 4월 19일 대한제국에서 재판소구성법을 공포했습니다. 나흘 후인 4월 23일 그는 처음으로 설치된 재판소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 다음 날 새벽 2시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망나니의 칼을 받던 참수형에서 교수형으로 바뀐 후 처음 사형이 집행된 것이지요. 문명개화의 탈을 쓰고 있지만, 재판절차를 보면 너무도 형식적이고 야만적이었습니다. 아마도 농민군을 하루빨리 잠재우려는 무능한 정부와 일본의 합작품이었겠지요.

아이러니한 것은 그를 재판한 재판관이었습니다. 바로 법무아문 대신이자 대표적인 개화파였던 서광범이었지요. 세상을 바로잡고자 하는 뜻은 같았지만, 길은 서로 달랐습니다. 장군이 돌아가신 2년 후 서광범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로부터 10여년 후 조선인은 결국 나라를 잃었습니다. 둘은 저승에서 만나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을까요. 

마음이 어지러울 때 서울 한복판에서 녹두장군을 만나보세요. 그는 아직 살아있는 눈빛으로 이렇게 말할 겁니다. 예나 지금이나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고.

/양중진 법무법인 솔 대표변호사

 

△양중진 변호사는 전라고∙고려대를 졸업한 뒤 중앙지검 공안1부장∙국정원장 법률보좌관 등을 역임했으며, <검사의 스포츠> <검사의 삼국지> <검사의 대화법> 등의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