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애덤 스미스를 강의하는 시간이면 할 말이 많아진다. 그가 경제학의 아버지인 까닭은 부의 근원을 딱딱한 금과 은의 보유량(중상주의)이 아니라 “여러분과 같이 지식과 기술로 발휘되는 인간의 생생한 노동생산력에서 최초로 찾았기 때문이다. 우리 스스로가 부의 주체”라고 말하면 학생들도 신난다.
때마침 올해 탄생 300주년을 맞아 애덤 스미스(1723~1790)가 호사를 누리고 있다. 고향 스코틀랜드와 영국에서 얼굴을 그린 스카프와 테디 곰 인형으로도 대중적 인기가 높다. 진즉부터 애덤 스미스는 작은 정부와 자유를 외치는 시장 자유론자들에게 유난히도 자주 소환되곤 했다.
애덤 스미스의 시장자유를 그렇게 맹목적으로 치켜세워도 될까? 위험하기 짝이 없다.「국부론」(1776)은 시장의 자유를 식량이 부족해서 굶어 죽어가는 기근 사태로 설명한다.
오늘날 가뭄으로 식량이 모자라면 정부는 곡물시장에 적극 개입하거나 당연히 매점매석을 단속해야 한다. 애덤 스미스의 생각은 달랐다. 정부 개입을 오히려 기근의 주범으로 지목한다. 정부가 흉년으로 치솟은 곡물가격을 합리적 가격에 맞춰서 팔도록 강요하면 상인들은 창고의 문을 꽁꽁 닫을 것이다. 그럴 경우 곡물 시장이 얼어붙어 가뭄 초기부터 기근이 일어난다. 정부가 억지로 곡물창고를 열어 제치면 앞 다퉈 소비가 늘어나게 되고 식량도 곧 떨어져서 가뭄이 끝나기도 전에 기근이 터진다.
기근의 해결책은 한가지였다. 곡물거래를 시장경제에 맡겨서 자유방임시키는 것이었다. 식량은 수요와 공급의 시장법칙에 따라 자동적으로 조절된다지만 누군가는 배고파서 죽어가야 한다. 부자는 괜찮지만 빈자들은 뼈저리게 고통을 겪는다. 아껴먹거나 굶주리지 않으면 안 된다. 덕택에 전체적으로 급작스런 기근은 피할 수 있게 된다.
애덤 스미스가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시장의 자유는 가혹한 채찍질까지 휘두른다. “굶주림(이라는 폭력)은 제아무리 흉맹한 동물이라도 순하게 길들이고 … 일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며 … 타인의 자비에 감사하는 마음을 우러나오게 한다.”(칼 폴라니,「거대한 전환」)
최근 시장자유를 외치는 정부여당이 왜 조롱까지 해대며 실업급여를 줄이거나 폐지하려는지 가닥이 잡힌다. 제대로 굶주려봐야 초라하고 착하며 열심히 일하고 감사할 줄 아는 인간이 된다. 시장은 어떤 처벌보다 더 교묘하고 반항도 못하게 사람을 길들인다.
아무 때나 애덤스미스를 끌어들이면 안 된다. 그는 당시 국가가 무능하고 부패했고 독점세력에 치우쳤기 때문에 정부 역할을 줄이고 민간부문을 자유로운 시장에 맡기고자 했었다. 지금 사정은 완전히 달라졌다.
기념 세미나에서 나왔던 질문처럼 애덤 스미스가 다시 살아난다면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노동 가치에 주목했던 그는 개인의 ‘지식, 기술, 판단력’을 기르고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불평등한 양극화 구조부터 제거하자고 국가에 주문했으리라. 기후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인간과 자연의 생태적 통합도 큰 정부의 역할로 올렸겠다. 지역 소멸과 불균형을 타파하고 새로운 국가의 성장 동력을 지역의 균형발전에서 찾자고 강조했을 것이다.
탄생 300주년에 개인의 노동과 지적 창의, 시장의 자유와 정의, 따뜻한 인간과 타인을 배려하는 공감(「도덕감정론」)에 더해진 유능한 국가와 보이는 손(the visible hand)이 뉴애덤 스미스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원용찬 전북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원용찬 교수는 <빵을 위한 경제학> <앞으로의 경제학:칼 폴라니와 스피노자로 읽는 경제학 에세이> 등을 저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