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정원에 천리향 한 그루를 심었다. 세 번이나 생명이 날아간 나무를 버리면서 다시는 사 오지 않겠다던 약속을 깨고 또 사 온 것이다.
늦은 봄 대추나무 묘목을 사러 갔다가 없다기에 엉뚱하게도 생각지도 않은 나무 몇 그루를 사 왔다. 그랬더니 주인은 뿌리가 없는 대추나무 두 그루를 덤으로 주면서 잘하면 살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그래서 일단 받아놓고 '천리향은 없느냐?' 물었더니 있긴한데 키는 좀 크지만, 잎이 한쪽만 나와 반값에 주겠다고 해서 가져온 것이다.
천리향은 중국이 원산지로 원래 이름은 '수향나무'인데 향기가 천 리까지 간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옛날 어느 스님이 잠결에 발견한 향기로운 나무라는 뜻으로 '수향'이라고 불렀다가 풍기는 향이 상서로워 '서향(瑞香)'으로 바꿔 불렀다는데 오래 보아도 질리지 않는 나무다.
아무튼, 이번에는 이 나무가 잘 자라서 내년 3월이면 집안을 온통 아름다운 향기로 가득 채워줄 거라 기대하며 사랑과 정성을 쏟았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2~3주 정도 지나자 잎이 마르고 점점 생기가 없어 보였다. 잘못했다가는 또 죽일 것 같아서 꽃가게에 들러 어떻게 해야 나무를 살릴 수 있냐고 물어보았더니 천리향 뿌리는 습기에 약해서 너무 습하면 살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곰곰 생각해 보니 부모의 과잉보호가 아이를 망치듯, 지나친 관심으로 물을 많이 줘서 역효과가 난 게 아닌가 싶었다. 그래서 화분을 뒤집어 보았더니 아닌 게 아니라 흙이 물기를 가득 머금고 있어서 얼른 마른 흙으로 바꿔주었다.
하지만 좋아지기는커녕 잎이 날마다 누렇게 변해가더니 이윽고 까매져 말라붙었다. 이제 더는 살 가망이 없어 보였지만 그래도 미련이 남아 뽑아버리지 못하고 화분을 아파트 화단 철쭉꽃 사이에 끼워 놓았다. 그리고 밖에 나갈 때 수시로 들여다보며 이제는 버려야지, 버려야지 하던 어느 날, 아니 이게 웬일인가. 새까만 나뭇가지의 마디마다 볼록볼록 파릇한 생명을 물고 있는 게 아닌가? 어제까지만 해도 죽은 줄 알았더니 이렇게 기사회생을 하다니?
화단에 내다 놓은 지 한 달쯤 되었을까? 홀로 더위와 장마를 견디며 사투를 벌이더니 가지 끝에서부터 싹을 틔우며 푸른 잎이 하나둘 돋아나서 바람에 나풀거린다. 신통하고 기묘한 그 모습이 예뻐서 그냥 보고만 있어도 절로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하마터면 한 생명을 버릴 뻔했는데, 이 얼마나 소중하고 가슴 벅찬 일인가? 순간 나는 생명이란 쉬 단정 지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 향나무에 정말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살릴 수 없다고 포기했던 천리향이 자연의 품에서 삶을 희생하는 모습을 보니, 자연의 힘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연 속에서 삶을 배우며 오랫동안 잘 참고 견뎌준 천리향의 강인한 생명력과 자연의 경이로움에 새삼 고개가 숙어진다.
어느 시인은 '그 어떤 소리보다 아름다운 언어의 향기...천리 밖에 있어도 가깝게 느껴져 마음속 깊이 간직했던 말 없는 말을 천리향의 향기로 대신 한다'고 예찬했다. 화려하지도 않으면서 아주 작은 꽃들이 모여 있지만 어느 꽃보다도 향기로움이 맘을 사로는 천리향, 베란다에서 월동하며, 하루에 2~3시간 정도의 햇빛만 들어와도 자라고 꽃피는 데는 문제가 없는 천리향, 오늘도 그대가 있어 행복하다.
△한일신 수필가는 <대한문학>으로 등단했다. 전북문협, 영호남수필문학회, 전북수필 회원이며 수필집 '내 삶의 여정에서', '징검다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