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장마와 태풍이 지나고 크나큰 생채기들이 남았다. 올여름은 ‘극한호우’라는 새로운 용어가 나왔다. 강은 물론 댐이 넘치고 산이 무너졌다. 대한민국이 한 달 내내 재난과 씨름해왔다.
안타까운 일들이 유난히 많이 발생한 여름이다. 제방이 무너져 지하차도가 침수됐고 산사태에 마을이 매몰되어 시민들의 생사가 엇갈렸다. 예고 없이 찾아온 사고로 하루아침에 가족과 이웃, 동료를 잃은 모든 살아남은 사람들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 슬픔을 가늠하기 힘들다.
필자는 얼마 전 수색자 실종에 나섰다가 희생된 故채수근 상병이 잠든 대전현충원에 다녀왔다. 전북(남원)의 아들인 그의 희생이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제의 2차 사고가 발생한 내성천은 경북 예천이 친정인 필자가 성장기에 자주 가던 하천이다. 그리고 필자의 아들은 불과 지난해 해병대를 전역했다. 해병대 가족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는 우리는 그의 묘소에 비통한 심정으로 참배했다.
채 상병의 희생을 불러온 2차 사고는 전형적인 인재다. 채 상병이 속한 포병부대는 해병대에서도 수영을 하지 않는 부대다. 사단 지휘부는 그런 부대원들을 구조전문가조차 들어가기 망설이는 급류에 구명조끼도 입히지 않고 들여보냈다. 빨간색 바탕에 크고 노란 ‘해병대’ 셔츠로 복장을 통일한 채 수색하라는 지시는 지금도 이해할 수 없다. 게다가 사고가 발생한 내성천은 모래사장이며 수심이 불규칙해 한 발만 내디뎌도 깊이 빠지는 곳이 많다.
최근 벌어진 재난대응 과정은 ‘아무도 책임지지 않으려는 국가’의 민낯을 보여주고 있다. 채 상병이 희생된 뒤 해병대 1사단이 유가족을 어떻게 위로하고 생존장병의 트라우마를 어루만지는지에 대한 소식이 없다. 오히려 여러 참사 때마다 관련 지휘자들의 책임회피와 신상에 변화가 생기지 않도록 엄호하는 행위들만 부각되고 있다. 어찌 잘못을 저지른 지휘자의 명예가 희생자의 목숨보다 귀하단 말인가?
이런 비정상적인 사건처리의 반복은 피해자와 가족에 대한 예의도 아닐뿐더러 국민에게 ‘각자 알아서 조심할 것. 알아서 살아남을 것’이라는 자조 섞인 메시지만 남기게 된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져야 할 국가가 생명을 이렇게 경시해도 되는 것일까?
재난 현장에서 최소한 주민의 생명을 구하고 2차 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막는 일은 지휘자가 생명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는지에 따라 결과가 바뀐다. 특히 재난현장에서 지휘자의 보여주기식 치적 또는 성과위주의 현장지휘가 구성원의 생사를 좌우한다는 것이 이번 사건으로 다시금 드러났다.
기후위기 속에서 집중호우와 일상이 위협받는 폭염 등의 현상은 이제 변수가 아니라 상수다. 앞으로도 재난은 예고 없이 계속 발생할 수 있다. 국가는 국가대로 큰 틀에서, 지자체는 지자체대로 상황에 맞는 종횡의 촘촘한 표준 재해·재난대응매뉴얼 구축이 절실하다. 실무자의 안전과 신분을 보장하는 일은 물론이다. 꼼꼼히 잘 만들어진 체계라도 내 가족을 지키는 심정으로 재난현장에 임하는 지도자의 리더쉽을 만나야 비로소 빛을 발한다.
필자는 기초의회 의장으로서 공직자들의 재난 대응에 그릇된 리더쉽이 또 다른 위험을 불러일으키지는 않는지 이 문제에 대해 깊이 고민해주기를 권한다. 또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해병대 가족으로서 올 여름 수해로 피해 입은 모든 분께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 불편한 여름의 일들이 잘 정리되기를 바라며 다시 한 번 故채수근 상병의 명복을 빈다.
/이해양 무주군의회 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