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중·러의 군사적 밀착이 제3차 세계대전으로 비화될 수 있다

이규하 전북대 인문대 명예교수

러시아 ‘보스토치니’에서의 푸틴·김정은의 만남과 군사적 협력 확약은 세계인들을 불안과 당혹에 빠트리고 있다. 그 이유는 ‘우크라이나 국지전’이 대전으로 비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세계 역사상 국지전이 대 전쟁으로 비화된 대표적 예를 들고자 한다. 

 첫째로, 민주주의 아테네와 과두정치의 스파르타가 싸운 동족상잔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다. 이 전쟁의 근본 원인은 스파르타가 아테네의 번영을 시기하고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국지적 충돌의 발단은 우리의 상황과 유사하게, 스파르타의 동맹국 테 베가 아테네의 동맹국인 플라타이아를 공격한 데서 비롯되었으며, 이 국지전쟁에 동맹국들까지 합세하여 27년간이나 계속된 대 전쟁이 되었다. 그 결과 아테네의 찬란했던 민주주의는 사라지게 되었고, 죽기보다 싫은 피죽을 먹으면서 병영생활(7~30세)을 강요해 강력한 군사력를 갖게 된 스파르타가 페르시아의 지원으로 마침내 승리했지만 이것이 몰락의 원인이 되었다.

 다음은 20세기의 최고의 지성 토인비가 그토록 비난한, 같은 하느님·예수님을 믿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가 중부유럽에서 30년간이나 싸운, 모든 것을 현지조달하기도 한 역사상 최악의 전쟁이었다. 그리고 이 대 전쟁의 발단은 역시 국지적 충돌에서 비롯되었다. 대부분의 유럽을 통치하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 속령 체코의 프라하에서 그곳 귀족들이 합스부르크가의 절대주의적 정책에 저항해오던 중 합스부르크가의 고위 관료들을 창밖으로 내던진(Prager Fenstersturz) 데서 장기간의 신·구교간의 전쟁으로 비화된 것이다.

 그 다음은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에 관해서이다. 제1차 세계대전은 제2차 세계대전(이 전쟁은 오스트리아 수도 비엔나 인근 브라우나우에서 태어난 히틀러가 그곳에서 김나지움까지를 졸업하고 비엔나로 와 룸펜생활을 하다가 독일로 건너가 나치즘을 중심으로 정권을 장악한 후 대 게르만국가를 건설하려다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음)과는 다르게 국지적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지 못한 데서 대전으로 확대된 것이다. 내용인즉, 오스트리아의 발칸반도 속령 보스니아의 ‘사라예보’에서 황태자 부부가 군 사열 후 세르비아의 독립군 청년에 의해 총살된 데서 비롯되었다. 전쟁준비가 되지 않았고 결단력 부족으로 오스트리아가 전쟁선언을 한 달간이나 미룬 상태에서 유럽 열강은 아무런 조처를 취하지 않는 중대한 과오를 범했다.

 마침내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2세는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의 “적극적으로 대응하라”는 격려의 전문을 받고 세르비아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최후의 통첩을 보냈다. 이에 범슬라브주의 대표국가인 러시아가 또다시 슬라브 국가가 붕괴되는 것을 막고자 전군 동원령을 내렸고, 프랑스는 광산자원이 풍부하고 보석이라 칭하는  알자스-로렌을 되찾기 위해 전쟁 시 러시아에 가담할 것을 분명히 했으며, 영국은 머뭇거리다가 중립 소국 벨기에가 독일군에 점령되자 의회의 만장일치 결의로 전쟁에 참여했다. 이에 대해 저명한 역사가들은 “당시 위대한 정치가가 없어 이 국지적 분쟁을 해결하지 못한 데서 세계대전으로 확대되었다”라고 평했다. 결론적으로 세계의 정치지도자들은 우크라이나 국지전이 또 다시 세계대전으로 비화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 해야 할 것이다.                  

/이규하 전북대 인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