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전주세계소리축제 리뷰] 가을과 형제의 우애는, 판소리와 함께 깊어져 갔다

송현민 씨

김일구(19일), 김수연(20일), 정순임(21일), 신영희(22일), 조상현(23일)으로 이어진 ‘국창열전’은 전주세계소리축제(9월 15~24일)가 오르기도 전에 간판 시리즈로 자리 잡았다. 이들을 보기 위해 전주행을 결정한 이도 여럿. 게다가 2016년부터 한국소리문화의전당 일대를 중심으로 진행되던 축제가 전주한옥마을이라는 열린 공간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소식도 반가웠다. 필자 역시 이런 기대감으로 정순임 명창의 흥보가 완창 현장인 한옥마을 동헌의 풍락헌 뜰을 찾았다. 동헌은 지금의 전주시장에 해당하는 전주 부윤의 집무실이다. 과거 행정의 현장은 국창열전의 김일구와 김수연이 달궈놓은 전 공연으로 판소리의 성소가 되어 있었다. 

다섯 명창의 공연 중 정순임 명창을 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조상현과 신영희 명창은 대중매체를 통해 자주 접했다. 김일구와 김수연 명창은 고령임에도 서울 무대에서 자주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왜인지 정 명창을 만날 기회는 드물었다. 그가 2020년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지정됐을 때도 코로나19로 그의 제대로 된 무대를 만나볼 수 없었다. 기회는 ‘국창열전’뿐이었다.

최동현 군산대 명예교수가 공연에 앞서 정 명창의 집안 내력을 해설하며 판을 달궜다. 장월중선(1925~1998)의 딸이자 명창 장판개의 조카, 이번 공연에 함께 하는 소리꾼 정경옥과의 남매. 2007년 문화체육관광부는 그의 집안을 ‘판소리 명가 1호’로 지정하기도 했다. 올해 여든인 정 명창은 단가 ‘인생 백년’으로 소리판을 열었다. 앞 좌석열과 정 명창과의 간격은 1미터도 되지 않았다. 동생 정경옥과 애제자 조애란이 스승과 여러 대목을 나눠 불렀다. 고수로 조용복, 정성용, 김철준이 북채를 바꿔가며 세 소리꾼과 함께 했다. 

판소리 완창은 3~4시간에 달한다. 듣는 방식도 다양하지 않으면 이 마라톤을 즐길 수 없다. 소리꾼의 소리에 집중해도 좋고, 주위의 정취를 즐겨도 좋았다. 시선을 문밖 너머의 돌담으로 옮기니 ‘조선의 뮤직비디오’가 펼쳐진 듯하다. 가사가 담긴 사설집을 부지런히 읽기도 한다. 판소리는 음악이기도 하지만, 가사(사설)는 고전문학의 한 갈래이다. 노래에 맞춰 131쪽 분량의 사설집을 한줄 한줄 읽다 보니 노래가 책 속의 글자들을 춤추게 하는 것 같았다. 소리와 소리 사이로 소리꾼들의 농조 담긴 꽃도 피어났다. 각 대목을 나눠 부르기로 한 세 소리꾼의 순서가 잠시 꼬이면 “아따, 이 대목부터는 우리 선생이 하셔야 하는디”라면서 제자가 너스레를 떨었다. 스승은 농담과 함께 나타나 뜻밖의 웃음을 선사했다. 완창 공연이지만 중간에 정경옥의 가야금병창도 들어갔다. 각본에 의한 정격화된 흐름이 아닌, 현장의 여흥을 관용하고 수렴한 소리꾼의 결정이 내린 막간 서비스였다. 

놀부가 죄를 뉘우치고 흥부와 우애를 다지니 한옥마을에는 저녁의 시간이 내려앉고 있었다. 좌식 의자마다 ‘로열(Royal)’을 뜻하는 ‘R’이 붙어 있었다. 정 명창의 소리로 모두가 왕중왕의 청중이 되어 동헌을 나왔다. ‘국창열전’ 시리즈가 내년에도 이어진다면, 여기 온 청중의 얼굴을 그 자리에서 다시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송현민 음악평론가는

음악평론가이자 월간 '객석' 편집장. 국립국악원 운영자문위원, 국민대 겸임교수이며, 국악방송 'FM국악당' 진행자로 저녁마다 공연 현장을 전한다. 제13회 객석예술평론상, 국립국악원 70주년 유공자 표창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