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수필]공들이기

김정길

어머님은 내가 어릴 때부터 “매사에 탑을 쌓듯 공을 들여야 한다.”고 귀에 옹이가 박히도록 말씀하셨다. 그리고 4월 8일 부처님 오시는 날이면 나를 데리고 고향에 있는 절에 가서 조상의 영가등(靈駕燈)과 가조의 연등을 켜고 몸소 공들이기를 실천하셨다.

절 부처님과 불탑뿐 아니라 산기슭 서낭당의 돌탑에도 작은 돌을 올려놓고 가족들의 소원을 비셨다. 내가 고향을 떠난 뒤도 새벽마다 정화수를 떠 놓고 가족들의 무병장수를 기원하셨다.

아내도 틈만나면 기린봉의 선린사에서 불공을 드렸다. 올해는 어머님이 돌아가신 뒤 처음 맞는 사월 초파일에는 아내와 함께 선린사에서 영가등과 연등을 켜고 불공을 드리다가 무심코 아내의 모습을 바라봤다. 아뿔싸, 아내의 모습이 마치 어린시절 절에서 불공을 드리시던 어머님의 환영처럼 다가왔다.

 '매사에 탑을 쌓듯이 공을 들여야 한다.'는 어머님의 말씀을 가장인 나를 대신해서 아내가 실천하고 있었다. 칠순에서야 비로소 어머님이 말씀하셨던 공들이기의 의미를 톺아보았다.

탑은 승려가 불도를 수행하여 교법을 펴는 사찰에 세워진 불탑과 마을 근처 당산이나 서낭당에서 소원을 빌며 공들여 쌓은 돌탑(石塔)이 있다. 

또 학생이나 문학도들이 마음속에 쌓는 글탑(書塔)도 있다. 불탑과 돌탑은 중생들의 번뇌를 벗고 성불하거나 불자들의 소원을 빌기 위함이며 글탑은 학생과 문학도들이 인격수양과 학문에 정진하는데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우리나라는 불탑(佛塔)이 들어오기 전부터 탑을 쌓는 믿음이 있었고 그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요즘은 서울 남산타워, 부산 용두산 타워, 대구 두류공원 타워 등 서양식 탑들이 그 지역의 랜드마크로 부상하고 있다. 또 서양식 높다란 '망루탑'들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서면서 서양문화가 우리 전통문화를 압도하고 있는 모양새다.

선조들이 애지중지했던 사찰 불탑이나 서낭당 등 돌탑 쌓기는 우리민족의 정서인데 우리 의식 속에서 잊혀가고 있다. 예컨대 경주 감은사 터에 남아있는 두 개 석탑은 신라 신문왕 때 왜적을 진압하기 위해 사찰 창건과 더불어서 쌓았다. 

비록 사찰은 사라졌지만 석탑은 천년이 넘도록 웅장한 자태를 잃지 않고 있다. 경주 불국사의 석가탑과 다보탑은 신라 경덕왕 때 쌓았는데 이들도 천년 세월의 강이 흘렀어도 갓 쌓은 탑같이 산뜻한 모습이다. 경주 보리사 3층 석탑도 여전히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한다.

우리고장 마이산에도 이갑용 처사가 100년 전에 쌓은 진안 마이산 탑사 80여기 돌탑은 천지탑을 중심으로 조화의 극치를 이루며 신비로움을 간직하고 있다. 전주 완산칠봉 정상의 서쪽 산자락에도 몇 년 전부터 어느 아름다운 손길에 의해 공든 돌탑이 하나둘 세워졌다.

그런데 누군가 그 돌탑을 자꾸 무너뜨렸다. 쌓기와 무너트리기가 몇 차례 반복되는가 싶더니 지금은 돌탑 9기가 완산칠봉 명소로 자리잡게 되었다. 칠순을 넘기도록 나는 석탑이나 돌탑은 커녕 글탑도 제대로 쌓지 못한 설익은 인생을 살았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만시지탄이지만 어머님의 유언을 말없이 실천해 온 아내처럼 마음을 다잡고 서낭당 돌탑과 글탑 쌓는데 공들이는데 매진해 볼까 한다.

 

△김정길 수필가는 2003년<수필과 비평>을 통해 등단한 김정길 수필가는 수필집 <어머니의 가슴앓이>, <지구를 누비는 남자>, <내 마음의 텃밭>, <자연의 속살 그 경이로움> 등을 내며 왕성한 창작 활동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