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지갑에 5000원 지폐 몇 장을 넣어두면 꼭 필요할 때가 있다고 귀뜸해 줬다. 어느 날 길을 나서는데 허리가 굽고 남루한 할머니가 리어카에 종이박스를 위태롭게 묶어서 느릿느릿 밀고 있었다. 할머니에게 슬그머니 가서 5000원을 쥐어드리며 행여 부담이 갈세라 말을 붙인다.
“사탕 사 잡수세요!”
다음 날 사거리에서 어떤 영감님이 박스를 정리하고 있었다. 요즘 폐지 값이 얼마냐고 말을 걸으면서 빨간 조끼 주머니에 슬그머니 5000원을 넣는다. 파란불 신호등이 켜져서 황급히 길을 건널 때까지 뒤에서 뭔가 아득한 시선이 떨어지지 않고 있음을 느낀다.
지갑에서 돈을 꺼내 5000원짜리를 만지작 거려본다. 지폐 앞면은 이율곡선생의 초상이 그려져 있고 뒷면은 꽃그림과 5000원의 숫자가 강조된다. 세계 어떤 지폐든 앞면은 성스러운 특성을 보인다. 만인이 떠받들고 화폐에 복종할 수 있는 믿음과 신뢰, 국가와 권위의 상징이 인물로 그려진다. 뒷면은 세속적인 시장거래에서 5000원어치의 상품과 서비스를 교환할 수 있는 속된 차원의 가격이 표시되어 있다.
화폐의 성스러움은 사람과 사람들을 사회적으로 묶어주고 커뮤니케이션의 징표로서 작용하는 사회통합의 가치가 담겨있다. 화폐는 언어다. 예를 들어 내 경우 밥 한 끼 먹거나 큰 금액이 아닐 때는 항상 현금을 지불한다. 그럴 때 마다 항상 고맙다는 인사말이 되돌아오고 서로 감사해한다. 화폐의 성스러움은 비인격화된 화폐에 휴머니즘의 숨결을 불어넣는데서 나온다. “화폐는 사람과 분리된 영혼 없는 사물로 묘사되곤 하지만 우리는 사회에 따뜻함을 불어넣기 위해 끊임없이 화폐를 인간화하고자 시도한다.”
화폐의 기원은 무엇일까? 물물교환의 번거로움을 없애기 위해 화폐가 시장에서 발명되었다는 교과서 내용은 잘못되었다. 화폐는 국가가 처음으로 발명했다. 옛날 마케도니아의 어느 장군은 정복지에 주둔했는데 금세 금고가 바닥을 드러냈다. 병사들에게 빚진 급료와 종군상인에게 빚진 채무도 많았다. 별 수 없이 주석쪼가리에 금액을 적고 왕실의 인장을 찍은 화폐로 빚을 갚았다. 뒤이어 화폐 통용을 강제하는 장군의 포고령이 나붙었다. 주석쪼가리 화폐로 제때 세금으로 내지 않으면 원주민들을 처벌한다는 것이었다. 그때서야 원주민들은 주석쪼가리를 화폐로 받아들여 병사들에게 각종 물자를 팔고 그것으로 조세도 납부하였다.
이렇게 채무를 해소하는 증서로서 화폐가 발행되었다는 것이 국정화폐설이다. 화폐의 지불은 빚을 갚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시장에서 소비자는 상품을 구입할 때 발생하는 채무를 해소하는 행위자이다. ‘내돈내산’처럼 당당하고 오만하게 화폐로 모든 권력을 행사하는 채권자가 아니다. 내 지인은 음식을 배달시켰을 때 ‘음식 빚을 지고 갚아야 하는 채무자’ 입장에서 항상 엘리베이터 앞까지 나가 기다린다.
학생들에게도 말한다. “여러분이 입고 있는 신발이나 옷, 책상도 자신들이 만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강의실의 전기 불빛에도 누군가 발전소에서 희생하거나 죽기도 하는 슬픔이 서려있습니다. 돈으로 무엇이든 살 수 있다는 속된 차원에서 벗어나 우리는 화폐 저 너머의 노고와 희생에 빚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나라가 어수선하지만 서로 누군가의 도움과 희생으로 한해를 무탈하게 보낼 수 있었음이다. 내가 태어나고 자라난 이 곳 지역에 빚진 사람으로서 우리들 삶을 인간답고 성스럽게 만들어야 하는 책무가 화폐의 경제학에도 깊이 담겨있음을 깨닫는다. 오늘따라 지갑 속의 5000원이 5만원짜리 보다 더 정겹다.
/ 원용찬 전북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