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의 시집에서 나를 사로잡는 서너 편의 시를 발견하는 것은, 독자에겐 큰 기쁨이다. 오십여 편 중 서너 편이라니 너무 소박하다 하겠지만, 아니다. 단 한 편의 시에 마음을 붙들려 다음 페이지로 넘기지 못했다면, 그것 또한 잔잔한 전율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이영종 시인의 <노숙>이 그랬다. 믿어야만 가능해지는 그 세계를 꿈꾸는 것에 슬픔을 느낀다. 하나는 멧돼지의 모정 때문이고, 또 하나는 ‘새 신문지’ 때문이고, 어느 사내 때문이다. 믿고, 믿고. 그러다 믿기지 않는 것을 맴돌다 돌아와 구겨 넣듯 다시 믿어야만 가능해지는, 영원한 현재가 되는 어떤 세계. 그렇다. 태초의 끝없는 공간, 그 카오스, 밤이 영원해지기 위해 나의 죽음을 대신한 멧돼지. 가련한 어떤 희망으로만 이뤄질 그 세계 속으로 몸을 던지는, 투신할 수밖에 없던 멧돼지의 내막을 알고 싶은 사내는 누구를, 무엇을 기다리는 걸까.
하지만 실재(實在)의 경계를 허물고 진입한 시인이 개태사역 근방에서 멧돼지 십여 마리가 떼를 지어 서성거렸다는 것을 믿기로 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노숙’의 세계는 사라지고 만다. 불완전한 간섭무늬로만 남는다. 시는 내 맘대로 읽으면 된다. 그것이 시인이 사라진 세계로 진입하는, 독자의 길이다.
“죽은 자는 눈이고 산 자는 사람이라 오늘의 눈사람이 반짝였다” (87쪽에서) 어제는 가버렸고 오늘은 삶과 죽음이 하나로 합쳐서 눈사람이 된 것. 반짝였다는 것은 생의 순간을 만드는 것이다.
여러 날 비가 왔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닷새. 그 이후의 비는 더 헤아리지 않았다. 그러다 오후 햇살이 화창했다. 봄이 왔다. 내가 전주에서 비로 여러 날을 헤아릴 때 강원도 산간이나 서울의 지인 몇이 마치 기다려 온 겨울의 첫 폭설인 듯 눈 속에 갇힌 사진을 보내왔고, 그 속엔 눈사람이 웃고 있었다.
눈이나 비가 오면 특히 어스름이 내리는 저녁엔 선이 사라지고 경계를 잃는다. 봄을 앞에 둔 눈은 사뭇 누구의 자유의지로 결정된 눈 같다. 이영종 시인은 그의 첫 시집에서 결정론과 자유의지, 갈등과 자유의지를 옹호하는 그의 태도를 보여준다. “손금과 지문의 정체성을 생각하며 인간의 선을 알아보려 애썼지만 정작 자신에게 주어진 선은 잘 모르므로, 자유의지를 발동해서 시 쓰기에 전념했다”라고.
사람은 수없이 많은 선을 긋는다. 시인은 『오늘의 눈사람이 반짝였다』에서 끊임없이 나와 너의 선을 가늠하고 세계의 규칙을 헤아리며, 생물과 무생물의 인연을 각인시킨다. ‘보이지 않는 끈’에 대한 갈증은 갈망으로 변주되어 강박적으로 찾아온다. 내가 서 있는 곳과 당신이 자리한 곳이 지구 반대편일지라도 끝내 만나고야 만다는, 결국 그를 내 곁으로 보듬어 들여 아직은 먼 무엇의 온도를 나누는 것이다. 그의 시는 모두 어딘가와 연결되어 있다.
정숙인 소설가는
2017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에 '백팩'으로 등단했다. 작품으로는 몇 편의 단편소설과 채록집 <아무도 오지 않을 곳이라는, 개복동에서>(2017)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