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3학년 때 이사 간 집 마당 가운데 오래된 우물이 정다웠다. 생기롭고 살가운 우물은 엄마의 치열한 삶과 내 소꿉 살림의 동반자였던 오돌토돌한 빨랫돌로 돌아갔다.
날마다 퍼내도 항상 차오른 우물은 하얀 냉이꽃과 고랑의 불미나리를 일으켜 세웠다. 메아리가 사는 두레우물은 얼마나 깊은지 속엣말을 털어놓아도 절대 새어 나가지 않았다.
우물물에 뛰어든 두레박이 고요를 흔드는가 싶더니 이내 기울어 컴컴한 침묵으로 동참했다. 한참 후 침묵을 깨고 올라온 샘물은 정신을 바짝 당기곤 했다. 우물에 비친 어릴 적 모습은 점차 어지럽던 꿈을 가지런히 헹궈 내던 시절만은 또렷하다.
별을 사랑한 청년도 우물을 가까이했다. 청년은 모자가 조금만 비틀어져도 반드시 고쳐 쓰고 길을 가는 시인이었다. 시인은 순수한 시절의 추억이 있는 외딴 우물을 자주 들여다봤다. 우물에 비친 모습 뒤로 펼쳐지는 평화로운 자연을 동경했다. 하지만 그림 같은 평화와는 거리가 멀었던 현실에 그는 슬프고 불안하고 까마득했다.
시인 윤동주는 고달플 때마다 그리움이 바다처럼 깊어진 우물을 들여다봤다. 어린 날의 자신을 돌아보며 숨을 고르고 무구한 신념이 흐려질까 두려웠다. 시의 물줄기자 영혼을 비추는 우물 앞에서 자신을 마주하는 용기를 냈다. 어수선한 세상에 쓸려가지 않으려 몹시 애썼다.
윤동주의 고향에서 가져온 우물물이 무지근하다. 절대 순수를 꿈꾸던 청년이 식민이라는 두꺼운 얼음장에 갇혔었으니 하늘을 우러르는 것 외에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인고의 시간이 두툼한 널빤지의 윤기를 빼앗고 쩍쩍 갈라 바짝바짝 타들어 갔을 그의 목마름이 간절하다.
국권을 강탈당한 윤동주의 한평생이 어둑한 우물에 흐른다. 타국 땅 구석진 곳에서 떨리는 몸 웅크리고 홀로 스러져 간 청년의 신음이 들리는 듯하다. 순수를 지향하던 청춘을 삼켜버린 어스레한 공간이 싸늘하다. 적막 속, 차가운 우물가에 앉아 참담했을 그의 생애를 더듬는다.
일생 주권을 가져 본 적 없는 그는 바다를 건넜다. 적국으로 가는 파도의 등줄기는 높았다. 시인의 순수한 영혼을 알고 있는 고향 집 우물도 울면서 바다로 따라나섰다. 고랑을 지나서 도랑에 들고 강에 흘러든 고향의 우물은 바다에 이르러 열린 우물이 되었다.
윤동주는 적국의 생활이 힘들면 잃어버린 고향 우물 대신 바다로 나가 하염없이 바라봤다. 바다는 아득한 어둠 속에서도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로 푸른빛을 간직할 수 있었다. 그런 위안도 잠깐, 그는 일본의 서늘한 감방에서 외로이 여위어 갔다. 얼음장 같은 마룻바닥에 누워서도 손으로 마루판의 물결 무늬를 쓸며 바다로 나아가는 꿈만은 포기하지 않았다.
바다는 멈추지 않고 철썩였다. 출판 비용이 없어 자기 작품을 일일이 필사한 청년의 시집, 원고지에 육필로 써 내려가며 겹겹이 그은 붉은 퇴고의 줄이 시인의 피눈물인 양 처절하다. 나라 잃은 지식인으로 사는 동안 시를 쓰지 않았다면 망국의 설움을 어떻게 견뎌냈을까? 시를 쓰던 시간만큼은 억센 손아귀에 시달리지 않고 스스로 숨 쉬는 유일한 순간이었으라.
봄은 또다시 오고 우물물은 새로이 차올라서 계속해 바다로 흐른다. 시인의 우물이 새순을 돋우어 숲을 키우고 마을을 풍요롭게 하더니 바다를 출렁이게 한다. '해처럼 밝은 아이'라 불리던 청년의 순수가 그리울 때, 내 어릴 적 우물이 생각날 때, 좋은 글이 쓰고 싶을 때, 나는 곧바로 바다로 간다.
'시인의 우물물이 흘러든 바다는 절대로 마르지 않는다. 저 깊숙한 곳 어디서도 샘 솟으며 멈추지 않던 시인의 맑고 선한 꿈과 이상을 오래 기억한다. 바다라고 부르는 활짝 열린 우물에 별빛이 가득하다.
△강지연 수필가는 월간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한국문인협회 회원, 전북문인협회 사무차장, 행촌수필문학회사무국장 역임했으며 '바다문학상' 본상을 수상했다. 수필집 <딸은 엄마의 허리춤에서 자라나고>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