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수필]외할머니와 복숭아

김금례

큰아들 내외가 힘겨운 듯 끙끙거리며 들어왔다.

자식들이 가져온 것들을 보면 어느 계절인지 알 수 있다. 오늘은 상자 안에 볼연지 붉게 칠한 복숭아다. 수줍은 새색시처럼 예쁘다. 나는 복숭아를 보면 외할머니를 만난 것 같다. 복숭아는 과식을 해도 탈이 없어 좋아한다.

할머니는 복숭아 과수원을 하셨다. 그래서 나는 여름이면 복숭아를 많이 먹으면서 자랐다. 복숭아 농사는 여름 한 철이라 온 식구들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오늘은 애지중지 키운 딸을 시집보내는 날 같다. 새벽에 일어나 복숭아를 따서 포장해 예쁜 상자에 넣어 동네 모정 앞에 세워둔 자동차에 실어 보내야 하루 일손이 끝난다.

잘 가라 손 흔들며 수건으로 땀을 닦는다. 나는 어려서부터 과수원 일이 참 힘들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도 할머니는 바구니에 복숭아를 한 아름 담아 집집마다 나눠 주면서 우리 아이들의 여름방학이 시작되면 전화를 하셨다.

“얘야! 복숭아 따는 날이니 아이들과 함께 와서 가져가거라." 세월은 흘렀지만 지금도 애틋한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출가한 외손자까지 챙기시는 할머니셨다.

복숭아는 비타민A와 C, 펙틴질이 풍부한 알칼리성 식품으로 면역력을 키워주며 피로를 풀어주는 유기산, 간 기능 개선과 혈액순환 개선 및 피부미용, 기능 개선에도 좋아 여름철 과일 중 황제라고 불리고 있다. 그걸 많이 먹고 자라서 지금까지 건강하게 지내는지도 모른다.

나는 외가에서 태어났으며 6.25도 외가에서 보냈다. 여름방학이 되면 책을 짊어지고 외가로 달려갔다. 온 식구가 과수원에서 생활하다 보니 나도 과수원에서 지냈다. 

어느 날 저녁 밤하늘 별을 보면서 과수원 움막에서 지냈다. 외할머니는 모기장 안에서 심청전을 재미있게 읽어 주셨다. 그리고 「춘향전」의 이야기에 밤이 깊어 가는 줄도 몰랐다. 할머니는 부채질을 해주시며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 채, 고기 잡는 아버지와 철모르는 딸 있다...'는 노래도 불러주셨었다. 60년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어제인 듯 눈에 선하다.

세월은 가도 추억은 남는다는 말이 새삼스럽다. 할머니는 노래를 부르시다 바스락 소리가 나면 멈추셨다. 그리고 내가 무서울까 봐 할머니는 나를 꼭 껴안아 주시고 한참 뒤에 손전등을 켜고 기침 소리를 내니 보자기를 든 사람이 도망치고 있었다.

 "할머니, 복숭아 도둑이지요?"

 "아니다. 동네 청년들이 저녁에 놀다가 배가 고프니 '서리'하러 온 것 같구나."

도둑이 아니라서 졸였던 가슴이 확 풀렸다. 할머니는 소탈하고 겸손하며 정이 많으셨다. 

세월은 훌쩍 지나갔어도 할머니에게서 받은 따뜻한 정은 아직도 내 마음 안에 살아 숨 쉬고 있다. 언제나 다정다감했던 외할머니는 아직도 나의 가슴 속에 살아계신다.

지금은 그 '서리'를 '도둑'이라 한다. 그만큼 세상이 각박해졌다. '서리'는 전통 시대 풍습의 하나로 여름철에 가장 많이 하며 주로 밭에서 했다. 남의 물건을 훔친다는 점에서는 '도둑'이라 할 수 있지만 일반적인 도둑과는 성격이 다르다.

 '서라'는 행위의 주체가 여러 명이며 재미로 하는 것이고, 규모가 작은 먹을거리에 한정된다. 그러므로 장난끼 서린 일종의 놀이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어른들은 그 행위에 대해 묵인해주는 것이 관행으로 되어 있다. 

여름에 복숭아를 보면 틈틈이 동화책을 읽어 주시면서 자장가를 불러 주셨던 외할머니 모습이 그리움으로 밀려온다.

 

△김금례 수필가는 <수필시대>를 통해 등단했다. 그는 한국문인협회, 전북문인협회, 전북수필문학회, 가톨릭문학회, 한국미래문화회원 가톨릭 신앙체험공모 사랑상, 행촌수필문학상, 전주시 시민강좌시장상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수필집 <꿈의 날개를 달고>, <꿈의 날갯짓>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