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샅을 빠져나왔습니다. 날이 갈수록 길은 점점 멀어지고 빨라졌습니다. 거칠 것 없이 더 멀리 더 빠르게 내달려야 직성이 풀리는 인간의 끝 모를 욕망입니다. 멀고 빠른 길에선 멀미가 납니다. 길과 세월과 나의 속도 차이 때문이겠지요. 자운영 꽃밭 지나 보리밭, 실오리 길이 지워진 뒤 종다리 울음 같던 휘파람 소리 다신 들리지 않습니다. 뒷마을로 이어지던 오솔길이 사라지기를 기다렸다는 듯, 뒷집 누님도 아랫말 형도 종적을 감추었습니다. 한 마리 무자치 같던 구불텅 논두렁에서 헛기침하던 아버지는 조반이 다 식었건만 돌아오시지 않습니다.
콘크리트 산책길 옆 사잇길에 기생화가 시들어 가네요. 꽃밭을 질러온 말 꼬리에 날아드는 나비인 듯 꽃 덤불에 들어섭니다. 더 시들기 전에, 아주 지워지기 전에 발자국 위에 발자국을 얹습니다. 내 발자국을 밟고 참새와 개개비도 길을 잃지 않겠지요. 막 피어난 달맞이꽃이 달개비꽃이, 꽃내음을 꽃빛을 머금고 있습니다. 글쎄요, 길이 세월을 따돌린 걸까요? 세월이 길을 따돌린 걸까요? 기웃기웃 한나절 희미한 사잇길에 수그린 사람이, 낮달의 등처럼 동그랗습니다.